‘트랜스의 제왕’ 아르민 판 뷔런이 난데없이 피아노 앨범 <피아노>를 냈다. EDM 차트에서 가장 많이 1위에 오르고 한 장르에서 정점을 찍은 DJ가 갑자기 클래식 음악에 빠진 이유는 뭘까. 아르떼가 직접 그에게 물었다.
세계 최고 작곡가는 누구일까.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을 꼽는 경우가 많다. 클래식 음악과 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EDM에선 어떨까. 1976년생 네덜란드 DJ 겸 작곡가인 아르민 판 뷔런은 EDM 역사에 남을 음악가다. 그는 연간 DJ 인기투표인 ‘DJ MAG 톱100’에서 역대 최대인 다섯 차례 1위에 올랐다. EDM과 팝 보컬을 결합했던 데이비드 게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회식의 마지막을 책임졌던 마틴 개릭스와 같은 기록이다.
뷔런은 반복적인 리듬 위에서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감정을 살리는 전자음악 장르인 트랜스의 1인자이자, 청취자 4400만여명을 두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스테이트 오브 트랜스’의 진행자다. 지난 11월 음원 플랫폼인 애플뮤직엔 그의 새 앨범이 올라왔다. 헌데 이 앨범엔 강렬한 리듬도, 고막을 때리는 전자음도 없었다. 대신 그가 직접 작곡한 피아노 작품 15곡이 담겨 있었다. 뷔런은 감미로운 피아노 앨범을 낸 이유를 이메일로 친절히 설명했다.
피아노, DJ에게 자유를 선사하다
뷔런이 클래식 음악계와 연이 없던 건 아니다. 그는 2013년 네덜란드 국왕 즉위를 기념해 열린 무대에서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네덜란드 왕가와 악단 단원들이 관객들과 함께 그의 비트에 몸을 맡겼다. 뷔런은 8살에 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하지만 피아노 선생님에게서 나는 ‘책 냄새’가 싫어 금세 그만뒀다. “지금도 후회하는 결정”이라고. 그래도 당시 배웠던 화음 지식이 초기 히트곡을 만들 때 도움이 됐다. 성공해 첫 집을 장만했을 땐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샀다.
그는 계속 배웠다. 뷔런은 네덜란드 왕실에 제왕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한 레이던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002년 대학을 졸업하고선 도기식 바비큐 조리법, 보트 운전을 배우고 헬스 매거진인 ‘맨즈 헬스’의 표지 모델도 하면서 새로움을 찾았다. 피아노는 2016년부터 다시 쳤다. 쇼팽과 사티를 연주하며 악보 읽는 법을 배웠다. 2020년엔 동생 엘러의 소개를 받아 피아니스트 제르니모 스네이츠호이벨을 만났다. 클래식과 재즈 모두에 능한 그는 뷔런의 음악적 상상력을 채워주는 피아노 선생이 됐다.
“스네이츠호이벨은 매주 두 시간씩 운전해서 저를 가르치러 왔어요. 그런데 전 매주 연습을 하진 않았죠. 그가 도착하기 전에 급하게 새 아이디어를 만들곤 했는데 다행히 제 스케치를 좋아해주더라고요. 그렇게 레슨으로 시작해 곡을 함께 쓰기 시작한 게 15곡이 됐어요. 전 스테인웨이 근처에 항상 작은 녹음기를 두고 즉석에서 간략한 아이디어들을 녹음했어요. 나중에 그걸 악보로 만들었죠. 배움과 작곡이 동시에 이뤄지는 아름다운 조합이었어요. 앨범에 담은 모든 피아노 소리엔 어떤 수정도 가하지 않았죠.”
피아노는 스튜디오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에게 탈출구가 됐다. “전자음악을 쓰려고 스튜디오에 앉으면 지난 주말 페스티벌 세트의 유령이 항상 방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또 다른 ‘빅 트랙’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구속처럼 느껴지곤 하죠. 댄스 음악은 BPM(분당 비트), 에너지, 구조 등에 맞춰야 하잖아요. 하지만 피아노 앞에선 이 어떤 것도 안 중요해요. BPM, 그리드(전자음악의 악기배열표)도, 퀀타이징(음의 길이나 높이를 그리드에 배열하는 과정)도 없어요. 단지 손가락, 건반, 그리고 이것들에서 나오는 것만 있을 뿐.”
교회에서 연주하자, 소리가 살아났다
뷔런은 비밀리에 피아노 앨범 녹음을 준비해왔다. 프로듀싱과 DJ 공연 일정 사이에 피아노를 호텔 방으로 빌려서 연습하길 반복했다. 공연 전후인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도 건반 앞에서 녹음 리허설을 계속했다. 앨범에 담을 곡 중 ‘소어링 카이트(Soaring Kite)’가 유독 손에 잘 감기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서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야 연주가 자연스러워졌어요. 음악과 싸우는 대신 연결된 거죠. 그때 서야 레코드에 담긴 테이크를 녹음했습니다.”
지난 3월 뷔런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 있던 오래된 교회에서 이번 앨범을 원 테이크로 녹음했다. 네덜란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인 리사 야곱스를 비롯해 첼리스트, 호르니스트 등이 함께 했다. “제 작곡이 실제 악기로 살아나는 과정을 듣는 경험은 압도적이었어요.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을 땐 솔직히 눈물을 참아야 했어요. 소리를 상상하거나 컴퓨터에서 디지털로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곤 했는데, 갑자기 이 소리들이 살아난 거죠. 어떤 플러그인도 복제할 수 없는 따뜻함과 깊이가 녹음 공간을 채웠습니다.”
이렇게 이른 아침 세팅으로 시작된 녹음은 늦은 밤에야 끝났다. 연주자들은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뷔런이 고려하지 못했던 뉘앙스를 더했다. 그는 ‘음악은 살아있는 것이요. 음악을 통제하지 않고 타인과 나눌 때 비로소 음악가가 성장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녹음 직전 함께 나눴던 침묵의 순간들엔 신성한 무언가가 있었어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모든 게 소리와 감정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죠. 이 경험은 음악에 대한 제 생각을 바꿔놨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가 가진 최고의 악기는 언제나 인간의 호흡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줬어요.”
인간의 호흡은 그가 꼽는 클래식 음악의 매력이다. “악구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은 연주가 아니라 연주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고. BPM에 맞추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할 때면 갑자기 음표 사이에 살아있는 공간이 생긴단다.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살려 녹음한 곡인 ‘파더 앤 손스’는 뷔런이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에게 바치는 곡이다. “‘롱잉(Longing)’ 이나 ‘이쿼니머티(Equanimity)’와 같은 곡은 추상적이고 순수한 감정을 구현하죠. ‘소닉 삼바(Sonic Samba)’는 유쾌한 제목인데, 리듬, 색채, 움직임으로 차 있는 작품이에요. ‘세팅 세일(Setting Sail)’은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설렘과 취약함을 반영하고, ‘비 마이 라이트하우스(Be My Lighthouse)’는 제 인생의 보금자리이자 길잡이였던 아내에게 바치는 헌정 곡입니다.”
트랜스에 숨은 바흐 찾기
뷔런의 EDM에도 클래식이 숨어 있다. 그는 쇼팽을 좋아한다. 그가 듣는 쇼팽의 음악엔 연약하면서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정적 깊이가 있다. “직접 쳐보려고 피아노에 앉을 때마다 쇼팽이 악구마다 얼마나 많은 디테일(세세함)과 감정을 담았는지 깨닫게 된다”고 할 정도. 어릴 적 뷔런의 아버지는 일요일 아침이면 말러 교향곡을 틀었다. “(말러가 만든) 광대한 감정의 풍경은 비극적이면서도 때론 고요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쇼스타코비치로 음악을 바꾸곤 했는데 이렇게 이어지는 긴장감과 아이러니는 어린 시절의 저를 매혹했어요. 이 음악들은 구조 안에 숨겨진 감정이 뭔지, 대비가 뭔지를 가르쳐줬죠. 클래식 음악의 요소를 전자음악에 섞겠다는 제 열정이 시작된 때였어요.”
구체적으로 그의 작품 어디에 클래식 음악의 흔적이 담겼는지 들어보자. “제 마지막 (EDM) 앨범에 담겼던 ‘바흐 투 더 퓨처’는 바흐의 대위법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어요. 멜로디들이 복잡하게 얽혀 대화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균형감과 역동성을 트랜스의 맥락으로 풀어내려 했죠.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느슨하게 영감을 받은 트랙도 있어요. 익숙한 모티프를 가져와 새롭게 변형했죠.” 소리를 층층이 쌓아 올리며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빌드업과 이를 해소하는 이완 과정은 트랜스 음악의 핵심이다. 이 과정 자체가 뷔런에겐 ‘교향곡적’으로 보인다고. 다른 DJ이자 작곡가인 티에스토도 ‘현악기를 위한 아다지오’를 트랜스 음악으로 변주한 적이 있다.
뷔런은 피아노의 매력을 강조했다. “전 기타 레슨을 받지 않았는데, 아마도 피아노 그 자체가 완전한 세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피아노를 연주할 땐 멜로디, 하모니, 리듬, 모든 게 손가락 아래에 펼쳐져 있어요. 피아노는 음악 구조 전체를 보여주죠. 이 때의 연주는 건물을 설계하며 청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해요. 실용적인 면에서도 피아노는 접근성이 엄청나죠. MIDI 키보드는 저렴하고 가벼울뿐더러 그냥 꽂고 연주하면 돼요. 전자음악에서 이 즉각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건반은) 촉각 세계와 디지털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돼 주죠.”
“피아노엔 인간적인 무언가도 있어요. 속삭일 수도, 천둥 치듯 울릴 수도, 내밀하거나 웅장할 수도 있어요. 연약하거나 타악기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해요. 이런 수준의 뉘앙스 표현은 제가 항상 끌렸던 것이죠. 많은 EDM 멜로디가 피아노에서 시작되는 이유입니다. 피아노는 분석적이면서 감정적인 면모가 다 있기도 합니다. 코드 진행의 논리를 가르쳐주는데 또 이 논리를 완전히 잊고 그냥 느끼면서 쳐도 돼요. 지성과 본능 사이의 완벽한 교차점입니다. 전 트랜스나 전자음악을 작업할 때 보통 단순한 피아노 모티프로 시작해요. 이 기본 형태로 나온 멜로디가 저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나중에 나올 모든 레이어(멜로디에 덧붙이는 다른 소리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피아노는 제 창작 과정의 영혼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고, 모든 곳이 돌아오는 곳이죠.”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