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노동 안 하는 부자들 색"…'올해의 색' 선정 두고 '술렁'

입력 2025-12-15 19:00
수정 2025-12-15 19:28
글로벌 색채 전문 기업 팬톤(Pantone)이 내년을 대표할 색으로 무채색의 ‘흰색’을 지목했다. 팬톤은 흰색을 선정한 것에는 '새로운 출발'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면서 내년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고요함과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부터 매해 시대 흐름을 담은 올해의 컬러를 선정해 발표한 팬톤의 선택은 산업 전반 색채 트렌드를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
올해의 색은 '무채색 화이트 컬러'팬톤은 지난 12일 서울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에서 '팬톤 올해의 컬러 2026' 서울 공식 론칭 행사를 열고 내년 공식 컬러로 화이트 톤의 '클라우드 댄서(Cloud Dancer)'를 선정했다.

이날 행사는 팬톤이 내년 공식 컬러를 첫 국내 론칭한 이벤트다. 다양한 업계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컬러 트렌드와 그 의미를 공유했으며 어도비, 엑스라이트, 삼성전자 등 글로벌 대표 기업들이 참여했다. 행사장 로비에서는 클라우드 댄서 컬러의 감성을 구현한 디저트와 시즌 스페셜 칵테일까지 제공돼 색이 주는 분위기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연출됐다.

팬톤이 선정한 클라우드 댄서 색상은 기존에 지정됐던 채도 높은 트렌드 컬러들과 달리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화이트 톤인 점이 특징. 팬톤은 이 색을 통해 변화와 혼란의 시대에 ‘고요함, 균형, 재시작’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클라우드 댄서’는 단순한 흰색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과 ‘정제된 여백’을 상징하며 공간·패션·제품 디자인을 포함한 다방면에서 활용 가능성이 기대된다.


팬톤에서는 클라우드 댄서를 활용한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글로벌 스마트폰 및 전자제품 기업 모토로라는 클라우드 댄서 컬러를 적용한 신제품을 준비 중이며, 가구 브랜드 조이버드, 생활용품 브랜드 포스트잇, 아동용 완구 브랜드 플레이도 등도 새로운 올해의 컬러를 제품에 적용할 계획이다.

서울 론칭 행사는 팬톤의 글로벌 컬러 철학을 한국 시장에 소개하고 국내 디자이너 및 브랜드들이 2026년 컬러 트렌드를 실무와 상품에 반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한국 공식 팬톤 파트너 ㈜포산인더스트리 관계자는 "클라우드 댄서 컬러가 지닌 조용한 아름다움과 균형감이 한국의 디자인 시장에서도 새로운 영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자들의 색' 비판도이번 팬톤의 선택에 대해 최근 몇 년간 올해의 색으로 채도 높은 색을 선택해온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선정 이유다. 팬톤 측이 강조한 의미는 '현대 사회의 과부하와 소음으로부터의 탈피'였다.

팬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 그저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할 때”라며 “(클라우드 댄서는)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빈 캔버스와 같은 색”이라고 설명했다. 통상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색으로 여겨지는 흰색이 필요하다고 진단될 만큼 올해 세계가 혼란스럽고 복잡했다는 얘기다.


로리 프레스먼 팬톤 부사장도 이날 행사에서 클라우드 댄서의 의미에 대해 "고요함·단순함·평온함·빈 캔버스(blank slate)·새로운 시작"이라고 꼽았다. 그는 "보통 ‘흰색’이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다를 수 있다며 클라우드 댄서는 더 자연스러운 화이트에 가깝고, 더 부드럽고 인간적인 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클라우드 댄서에는 '포용적'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주요 외신에선 클라우드 댄서가 선정된 것에 대해 색채 평론가들의 입을 빌려 "전례 없는 문화적 정체기에 적합한 선택"이라고 짚었다. 유튜브·틱톡 등의 대중 문화 콘텐츠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피로감이 누적된 상황에서,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빈 캔버스’가 적절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주요 외신은 이번 선정을 두고 정치적 의도가 느껴진다거나 지루한 색이라는 평가를 내놓으며 논쟁에 불을 지폈다.

NYT는 "최근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할 때 ‘흰색’은 평온함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며 겉으로는 번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처치 곤란한 문제를 뜻하는 ‘방 안의 흰 코끼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부자들의 색이라는 지적도 내놨다. 때가 타기 쉬운 흰 옷을 입고 그 청결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여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NYT는 "역사적으로 흰색은 부를 상징해 왔다”며 팬톤의 의도가 서민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꼬집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