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책임을 지고 박대준 쿠팡 대표가 사임했다. 후임에는 쿠팡 모회사인 미국 쿠팡Inc의 해럴드 로저스 최고관리책임자(CAO) 겸 법무총괄이 선임됐다.
박 대표는 10일 “국민을 실망시켜 송구하고 사태 발생과 수습 과정의 책임을 통감한다”며 전격 사퇴 의사를 밝혔다. 로저스 대표는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의 법률 전문가로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 거라브 아난드 최고재무책임자(CFO)와 함께 쿠팡Inc를 이끄는 핵심 경영진 중 한 명으로 김 의장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이번 대표 교체는 쿠팡에 대한 정부의 압박 수위가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이뤄졌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이날 “쿠팡 사태가 심각한 수준을 넘었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검토를 지시했다. 경찰은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를 이틀 연속 고강도 압수수색했다.박대준 후임에 美변호사 로저스…"의장 못 봤다"는 박 대표 퇴진
'호화 대관' 안통하자 법률가 등판…"법적 리스크 전면 대응" 해석도
“올 들어 김범석 의장을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지난 2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증인으로 출석한 박대준 쿠팡 대표는 이렇게 진술했다. 김 의장이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된 모기업 쿠팡Inc를 통해 한국 쿠팡을 지배하고 있으나 정작 한국 쿠팡의 최고경영자(CEO)는 실질적 오너인 김 의장에게 대면 보고조차 못 하는 현실이 여과 없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결국 한국 쿠팡은 모기업인 쿠팡Inc의 최고 의사결정자 중 한 명인 해럴드 로저스 최고관리책임자(CAO·사진)를 새 대표로 맞아 사태 수습에 나섰다. ◇“신뢰 회복을 우선순위에 둘 것”쿠팡Inc가 급파한 로저스 신임 대표는 10일 선임 직후 사내 메시지를 통해 조직 추스르기에 나섰다. 그는 “지금 최우선 순위는 신뢰 회복”이라며 “정보 보안을 대폭 강화하고 조직을 안정시키겠다”고 했다.
로저스 대표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와 미국 대형 로펌 시들리오스틴 파트너변호사, 글로벌 통신기업 밀리콤의 최고윤리준법책임자를 거쳐 2020년 쿠팡에 합류했다. 김 의장과 하버드대 동문이자 그룹 내 ‘복심’으로 통하는 로저스 대표가 한국에 상주하면 의사결정 단계가 대폭 축소돼 자금 집행이나 보안 시스템 개편이 즉각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게 쿠팡 측의 설명이다.
로저스 대표의 등판은 쿠팡이 처한 상황이 창사 이후 최대 위기임을 보여준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쿠팡 사태를 두고 “심각한 수준을 넘었다. 그야말로 윤리적인 기본의 문제”라고 질타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도 경고했다. 총리가 특정 기업을 두고 ‘징벌적 배상’까지 거론한 것은 이례적이다.
수사당국도 나섰다. 경찰은 전날 10시간에 걸친 고강도 압수수색에 이어 이날도 쿠팡 본사에 수사관을 보내 강제수사를 벌였다. ◇소송 이슈 직접 대응할 듯일각에선 이번 인사가 오는 17일 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된 김 의장의 국회 출석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 인사라는 비판도 나온다. 로저스 신임 대표는 김 의장을 대신해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다. 책임 경영보다는 미국 변호사 출신 최측근을 전면에 내세워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인사라는 분석이다.
실제 쿠팡을 상대로 한 대규모 소송전은 이미 시작됐다. 국내에선 시민단체와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피해자가 소송 참여 의사를 밝혔고, 일부는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 미국에서도 본사를 상대로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 책임을 묻는 주주들의 집단소송 움직임이 구체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2021년 쿠팡 상장 당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기준에 맞춰 글로벌 수준의 준법 경영,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구축한 로저스 대표가 향후 쿠팡을 상대로 제기될 각종 소송 대응을 진두지휘할 것으로 보인다.
유명무실해진 ‘호화 대관팀’의 초기 대응 실패를 법리로 덮으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 쿠팡은 그동안 대통령실, 경찰 출신 전관을 대거 영입하며 막강한 ‘대관 라인’을 구축해 왔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이들은 사후 수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로비와 인맥을 통한 ‘정무적 해결’이 불가능해지자 법적 대응 모드로 전환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의장이 증인으로 채택된 상황에서 박 대표가 물러나고 그 자리에 미국인이 선임되면서 국회와의 소통이 더 어려워졌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로저스 대표가 증인으로 나오더라도 한국 실정과 정서에 어둡다는 점, 통역과 문화 차이 등을 방패 삼아 공세를 피해 갈 가능성이 크다.
안재광/라현진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