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의 오랜 숙원 중 하나였던 간첩법 개정이 9부 능선을 넘었다. 반도체 등 국가 전략산업 관련 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려는 시도가 늘어나는 가운데, 기존 산업기술 유출 방지 및 보호법만으로는 처벌 수위가 약하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여야가 오랜만에 힘을 모아 최대 사형까지도 가능하도록 규정한 간첩법 개정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합의 처리했고, 이제 본회의 통과만 남겨두고 있다.72년 만의 간첩법 개정국회에 따르면 지난 3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간첩법(형법 98조) 개정안이 통과됐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일본 전시형법을 모방해 만들어진 뒤 한 번도 수정된 적이 없던 조항이 72년 만에 개정의 첫 관문을 넘은 것이다.
현행 간첩법은 ‘적국’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한 경우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적국’을 사실상 북한으로 한정해 적용해 왔기 때문에, 북한 이외의 외국으로 국가 기밀을 유출하더라도 간첩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꾸준히 지적돼 왔다.
이번 개정안은 이러한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98조 2항을 신설해 ‘적국’의 범위를 명확히 했다.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를 위해 외국 등의 지령·사주·의사 연락 하에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전달·중개하거나 이를 방조한 자를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 같은 법적 공백은 실제 사례에서도 확인됐다. 지난해 6월 중국인 유학생 3명은 해군작전사령부와 미 항공모함 등을 드론으로 촬영해 중국 소셜미디어에 유포했다가 적발됐다. 이들은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군 기지를 촬영·유포했지만, 현행 형법상 간첩죄는 ‘적국’인 북한을 위한 행위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간첩법으로 처벌할 수 없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이러한 공백이 해소되고, 내부 기밀 유출뿐 아니라 사이버 해킹 등 정보 수집 행위 자체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국가 안보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7핵심기술 유출 산업스파이 철퇴산업계에서도 법 통과를 반기는 분위기다. 간첩법이 개정되면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 기업에 산업·과학 기술을 빼돌리는 산업 스파이 행위도 형법상 간첩죄 적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외 기업들은 반도체·배터리 등 국내 첨단산업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기술 탈취를 시도하며 빠르게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다. 산업통상부가 국회에 제출한 ‘업종별 산업기술·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 현황’에 따르면, 2020년부터 올해 6월까지 국가핵심기술 33건, 산업기술 110건이 해외로 유출됐고, 이로 인한 피해 추산액은 23조2700억 원에 달했다.
현재 산업 스파이는 산업기술보호법을 통해 처벌해 왔다. 이 법에 따르면 기술을 해외로 유출할 경우 최대 15년까지 징역형 선고가 가능하지만, 실제 법정에서는 징역 1~2년 또는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이 때문에 산업계에서는 “산업 기술 유출 시에도 간첩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다만 이번 개정안이 간첩죄 적용 대상을 ‘국가 기밀’에 한정한 데 대해서는 아쉬움도 남는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은 간첩죄의 범위를 산업 기밀 등 경제안보 영역까지 확대하길 바랐지만 이번 개정안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방산 분야나 국가 첨단기술처럼 국가 기밀로 해석될 수 있는 영역은 보호받게 된 만큼 의미가 작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법사위 처리는 여야 협치가 모처럼 작동한 사례로 평가된다. 국민의힘에서는 윤상현 의원과 나경원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고,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국가정보원 출신 박선원 의원이 발의했다. 김병기 원내대표 또한 개정 필요성에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추진해 개정안의 법사위 통과에 힘을 실었다.
최형창 기자 ca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