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붕괴 5적이라니"…'낙인 찍기'에 분노한 기업들 [김익환의 부처 핸즈업]

입력 2025-12-08 06:00
수정 2025-12-08 09:45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린 게 정말 기업입니까?"

최근 한 대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기자에게 답답함을 토로했다. 고환율의 원인을 두고 정부와 일부 언론이 수출기업·국민연금·서학개미를 지목해서다. 일부 전문가와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을 ‘환율 붕괴 5적’이라는 낙인까지 찍었다.

기업들은 유보금을 축적하고 해외 환전을 주저하고 있다. 해외에 170조원 이상의 유보금을 쌓아뒀다. 하지만 이 같은 기업 행보는 투자·위험관리 차원에서 자연스러운 의사결정이라는 평가가 많다. 앞선 대기업 CFO는 “대미 투자를 하려면 달러를 확보해야 하고, 원화약세에도 대응해야 한다”며 “왜 기업이 달러를 들고 있다고 비난받아야 하냐”고 반문했다.

8일 한은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해외법인 유보금(재투자수익수입)은 관련 통계를 집계한 1980년 1월부터 올해 10월 말까지 누적으로 1156억2430만달러(170조원)를 기록했다. 올들어 불어난 해외 유보금은 78억달러(약 11조원)로 전년 동기 대비 40.2% 늘었다.

재투자수익수입은 한국 기업이 10% 이상 지분을 가진 해외 자회사가 국내로 배당하거나 현지 투자로 사용하지 않고 내부에 쌓아둔 금액을 뜻한다. 해외법인 유보금은 장기적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2023년에 예외적으로 해외 유보금 증감액은 -127억830만달러를 기록하는 등 25년 만에 감소했다. 해외에 쌓은 유보금보다 국내로 송금된 배당금이 더 많았다는 의미다. 외환위기로 기업이 외화 조달에 총력을 쏟던 199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23년 해외 유보금이 감소한 것은 2023년부터 시행된 법인세법 개정안과 맞물린다. 2023년부터 해외에서 세금이 매겨진 배당금의 95%를 국내에서 비과세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그 이전까지는 해외 자회사 배당이 국외·국내에서 모두 과세되는 ‘이중과세’ 구조였다.

하지만 2024년 이후 유보금은 다시 증가세로 전환하며 사상 최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해외 배당금 비과세 비율을 현행 95%에서 100%로 확대해 자본의 국내 유입을 촉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효과는 미세먼지 줄이려 고등어 구이를 금지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근본적 해법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도 힘을 얻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경제 펀더멘털을 개선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급증한 통화량 역시 원화 약세의 주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 9월 통화량(M2·원계열·평잔)은 4426조389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5% 늘었다. 상장지수펀드(ETF) 등 수익증권을 제외한 M2 증가율도 6.3%로, 같은 기간 미국·유로존(EU) 등 주요국을 크게 웃돈다.

미국의 지난 10월 1일 기준 M2는 22조2981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7% 증가했다. 한국의 통화량 증가 속도가 주요 선진국보다 훨씬 빨랐다는 의미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