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버스 안이나 길거리에서 3초에 한 번씩 눈에 띌 정도로 흔하다고 해서 ‘3초백’으로 불리던 루이비통 백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명품의 대명사로 꼽혔다. 장년층 어머니 옷장 한켠에 하나씩은 있는 값비싼 가방 중 하나가 루이비통 스피디 백이다. 다만 판매량이 치솟으면서 되레 브랜드 파워가 떨어지는 흐름을 맞이했다. 명품의 최대 매력인 희소성이 사라지고 ‘짝퉁’이 늘면서다. 명품시장에서도 하이엔드 브랜드로 분류되는 루이비통이 글로벌 명성에 비해 국내 시장에서만은 유독 매스티지 명품 취급을 받는데는 이같은 이유가 있다.
루이비통이 한국시장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시도를 한다.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6층 짜리 세계 최대 규모의 매장을 열면서다. 물건을 파는 매장은 물론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브랜드 전시 공간, 카페와 식당까지 건물 전체가 루이비통을 알리기 위한 체험형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 곳에서 루이비통이 강조하는 가치는 ‘장인 정신’이다. 지난달 '루이비통 비저너리 저니 서울'을 방문했다.
미래형 명품 매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부아뜨 샤포'로 둘러싸인 터널형 공간이 관람객을 과거로 데려간다. 부아뜨 샤포는 17~19세기 유럽에서 귀족들이 모자를 보관하던 박스를 뜻한다. 당시 모자는 신분을 상징하는 사치품으로 꼽혔다. 그만큼 모자가 구겨지거나 훼손되지 않게 지니는 것이 중요했다. 귀족 소비자들은 이동하거나 여행하면서 모자를 보관할 수 있는 고급 케이스를 원했는데, 이를 루이비통에서 만들어 팔았다. 모자박스, 여행용 가방 등 트렁크 제품을 만들던 루이비통이 글로벌 럭셔리 하우스로 거듭난 과정을 ‘시간 여행’처럼 체험할 수 있게 연출한 공간이다.
이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1~3층 매장, 루이비통의 역사를 테마별로 담은 4~5층 문화 체험형 공간, 6층 레스토랑, 마지막에 들른 4층 기프트숍과 카페까지 루이비통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여정이 쭉 이어졌다.
여성 가죽 제품과 액세서리, 뷰티, 시계와 주얼리를 선보이는 1층 매장은 트렁크스케이프 뒤편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2층 여성 레디 투 웨어 매장으로 이어진다. 2층은 여성 레더 굿즈, 레디 투 웨어, 슈즈를 선보인다. 3층은 남성 섹션으로, 레더 굿즈, 액세서리, 레디 투 웨어, 트래블 컬렉션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각 층에서는 '루이비통 비저너리 저니 서울'에서만 공개되는 익스클루시브 캡슐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다.
4~5층의 문화 체험형 공간에선 여행, 장인 정신, 혁신이라는 하우스 유산에 초점을 맞춘 몰입형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전시는 '시게마츠 쇼헤이-OMA'와 협업해 구성됐다. 루이비통의 역사적 순간을 여섯 가지 장면으로 묶어 보여주는 기원(Origin) 룸에서 출발하는데, 브랜드의 패턴·소재·트렁크 디자인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정리해 보여준다. 라이프스타일·워치·피크닉 등 각 방들은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던 루이비통이 일상 영역으로 제품을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공방 룸은 관람객을 장인의 세계로 초대한다. 장인들이 가죽이나 황동을 손질하며 트렁크를 만드는 장면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테스트 룸에서는 트렁크·가방 등의 내구성을 확인하는 기계를 전시해 루이비통의 제품력을 확인시켜준다. 협업·패션 룸에서는 협업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아티스트들의 독창적인 비전이 만들어낸 제품들을 보여준다. 마크 제이콥스, 킴 존스, 버질 아블로의 역사적인 협업 디자인부터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퍼렐 윌리엄스의 창작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전시하고 있다. 루이비통 측은 "모든 장들이 루이비통의 발명 정신이 담긴 하나의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6층의 레스토랑 '제이피 앳 루이비통'은 뉴욕의 미쉐린 투 스타 레스토랑 '아토믹스'로 잘 알려진 한국 출신 박정현 셰프의 미식을 선보인다. 메뉴도 한국식이다. 코스는 부드러운 계란찜과 함께 제공되는 간장 게장부터 한국식 겨자와 고추장으로 풍미를 더한 랍스터, 비트와 갈비 소스를 곁들인 한우 안심, 장인의 손길로 만든 쌀 아이스크림과 감귤 소르베 위에 은은한 막걸리 폼을 올린 디저트까지 이어진다.
기프트 숍에서도 서울을 위해 특별한 착장을 한 캐릭터 마스코트 '비비엔'이 자리 잡고 있다. 펜슬 파우치를 비롯한 익스클루시브 아이템, 위트와 장인 정신이 어우러진 '아트 오브 기빙' 등을 살펴볼 수 있다. 4층 한편엔 '르 카페 루이비통'도 자리 잡고 있다. 2025년 세계 최고의 페이스트리 셰프로 선정된 '막심 프레데릭'의 디렉팅 아래 페이스트리와 프랑스 전통에 한국적 감성을 더한 바리스타 메뉴가 어우러진 티타임 경험을 선보인다. 초콜릿 모노그램, 티라미슈 몬테나폴레오네, 바닐라 드림, 헤이즐넛 플라워, 스트로베리 샬럿, 고구마 페툴라 등이 메뉴로 제공된다.
디올백 8만원 사태가 부른 명품 불신…루이비통 전략은 루이비통 비저너리 저니 서울은 글로벌 명품업계 및 패션 미디어에서 실험적인 매장으로 꼽힌다. 명품 브랜드들이 앞으로 지향해야할 미래형 플래그십 매장 형태라는 것이다. 미국 패션전문매체 WWD는 “단순한 판매 공간을 넘어 전시와 미식, 리테일을 한 곳에 담은 새로운 형태의 매장”이라고 평가했다. CPP-LUXURY도 “서울 매장은 단순히 지역 시장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문화와 소비, 경험을 융합하는 전략을 실험하는 중요한 곳”이라고 분석했다.
특이한 점은 이 거대한 홍보의 장에서 루이비통은 신제품 등 당장 팔고 싶은 상품을 내세우기보다는 역사나 제작 과정, 장인 정신 등과 같은 브랜드 근본 요소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다소 수익성을 제한할 수 있는 선택이다. 이는 최근 명품 시장의 분위기와 맞닿은 전략으로 풀이된다. 루이비통과 같은 LVMH 소속 다른 명품 브랜드인 디올의 385만원짜리 가방 원가가 8만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 럭셔리 브랜드의 가격에 대한 의문이 나오는 상황이다. 불신을 타개하기 위해 루이비통은 장인 정신을 마케팅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루이비통은 왜 이같이 중요한 전략 매장을 서울에 열었을까. 명품 수요가 남아 있는 시장이면서 마케팅 효과도 큰 지역이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명품 시장 규모는 약 23조원대로 추산된다. 이 수치는 단일 국가로서 꽤 큰 규모이며 특히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1인당 명품 소비력이 상당하다는 분석이다.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한국인 1인당 연간 평균 325달러(약 48만원)을 명품에 지출한다는 집계를 내놓으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출을 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브랜드 평가가 가장 빠르게 확산하는 시장으로도 꼽힌다. 새로운 제품에 대한 반응이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셀럽 소비를 통해 즉각 공유되고, 이는 아시아 전반은 물론 글로벌로 확산할 정도로 전파력이 있다. K컬쳐 열풍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점을 감안하면 루이비통이 아시아 최대 규모 비저너리 전시와 파인다이닝을 동시에 배치한 매장을 최대 관광지역인 명동에 세운 것 역시 전략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명품 브랜드 관계자는 “한국시장에서 명품 열기가 다소 꺾였다지만 여전히 브랜드 매장 단위별로 글로벌 1위 매장이 다수 나올 정도로 큰 시장으로 꼽힌다”며 “명품 성숙기에 접어든 일본이나 물량 공세가 먹히는 중국에 비하면 취향이 까다로우면서도 구매력이 있고, 한 국가에서 서울이라는 단일 지역에 명품 수요가 완전히 몰리는 특성상 체험형 매장을 세워 시장성이 있는지 실험해보기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시장이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