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간동안 빛난 음악과 아쉬움 남긴 무대와 연출...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입력 2025-12-07 09:34
수정 2025-12-08 16:34


202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티켓이 현지시간 지난 1일 온라인 판매 시작 90분 만에 전석 매진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이 폭발했다. 페스티벌 150주년을 맞아 새롭게 구성된 프로그램에 대한 열기는 좌석을 확보하지 못한 관객들의 항의 섞인 SNS 반응으로 이어졌고, 바그너 음악극의 위상은 오늘날 오페라 산업에서도 여전히 절대적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지난 한 주간 국내에서도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이례적으로 뜨거웠다. 국립오페라단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막 초연이 열린 지난 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는 공연 시작 한참 전인 오후 2시 이전부터 이미 주차장이 만차였고, 음악당 주차장으로의 회차 안내가 이어졌다. 평일 오후임에도 로비는 오페라 애호가, 음악 전공자, 공연 산업 종사자들로 붐볐다.

이 작품이 받는 유별난 관심은 오페라의 탄생 배경과 음악사적 의미에서 비롯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흔히 ‘낭만주의의 완성형’ 작품으로 평가된다. 다른 바그너 작품이 게르만 신화와 민족주의를 반영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작곡가의 체험이 서사의 핵심을 이루는 보기 드문 오페라다. 바그너는 후원자 오토 베젠동크의 아내 마틸데와의 비극적 사랑을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투영했다. 베젠동크에게 발각돼 끝이 난 둘의 밀회는 작품의 2막에서 마르케 왕이 왕비 이졸데와 충신 트리스탄의 만남을 목격하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1막 전주곡에서 시작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파?시?레#?솔#’의 이른바 ‘트리스탄 화성’은 기존 조성 체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근대 음악의 문을 연 기념비적 코드다. 전통적 조성처럼 해소와 안정을 지향하지 않고, 다음 화음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가며 긴장을 축적하는 이 화성은 ‘떠 있는 조성(Floating Tonality)’이라 불린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를 “홈이 없는 야구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화성은 이후 드뷔시의 인상주의,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알반 베르크의 12음 기법으로 이어지는 20세기 음악사의 출발점이 됐다.

한국에서 이 거대한 오페라가 처음 소개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전곡 초연은 2012년 정명훈의 지휘로 서울시향이 콘서트 버전으로 선보였으며, 두 차례 휴식을 포함해 약 6시간에 달하는 이 대작은 2025년 얍 판 츠베덴의 지휘 아래 국립오페라단이 전막 오페라 형태로 다시 올리며 국내 오페라 제작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지금까지 음악만 4시간이 넘는 전곡을 완주한 국내 오케스트라는 서울시향이 유일하다.



독일 바이마르 오페라와 코트부스 오페라의 극장장을 역임한 슈테판 메르키가 연출을 맡았다. 막이 오르자 무대에는 UFO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이 등장했다. 바그너의 ‘무한 선율’을 시각화한 듯한 원형 조명 장치에서 오는 첫인상만큼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시공간을 우주로 재해석한 무대와 의상, 그리고 인물의 감정과 내면이 배제된 연출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립오페라단이 보도자료를 통해 소개했던 1막의 나선형 구조물과 벽체들은 찾을 수 없었고, 전막에 걸쳐 같은 무대 장치로만 공연이 전개됐다. 무대 뒷면에 동일한 영상의 반복, 주인공들의 거대한 몸을 더 육중해 보이게 디자인된 의상도 바그너의 심오한 작품세계에 몰입하는데 방해요인이 됐다.



무대와 연출적인 부분에서는 2023년 독일 코트부스 오페라에서 메르키가 연출한 이 작품에 대해 브란덴부르크 지역을 기반으로 한 독일 온라인 매체가 남긴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블리크리히트(Blicklicht)는 리뷰 기사를 통해 “유려하게 휘어진 우주선 유리창에 비치는 거대한 반사 효과로 2막의 사랑 도취 장면은 의도치 않게 우스꽝스러웠으며, 관객은 때때로 왜곡된 모습으로 비치는 주역들의 실루엣을 보며 난처함을 느꼈다”며 “두 번째 휴식 시간에 실패한 시각적 연출에 대한 관객들의 아쉬움이 로비에 가득했다”고 전했다.




세계적 바그너 전문 가수로 소개된 두 캐스팅의 남,여주인공의 가창 능력 측면에서는 두 명의 이졸데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4일 첫 공연에서 이졸데를 노래한 영국 출신 호크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는 따뜻한 음색, 명료한 딕션, 안정된 호흡과 연기로 작품의 중심을 훌륭히 지탱했다. 5일 공연에서 소프라노 엘리슈카 바이소바가 노래한 이졸데는 강한 여전사 같았다. 100인조 오케스트라의 풀 사운드를 뚫어버리는 그의 성량은 압도적이었다.



반면, 두 명의 테너 모두 ‘오페라 역사상 가장 낭만적 사랑 이야기’라 일컫는 이 작품의 중심을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일 공연에서 트리스탄 역을 노래한 테너 브라이언 레지스터는 성대에 큰 문제가 생긴 듯한 가창으로 객석에 불안감을 조성했다. 긴 시간 동안 고음역을 소화해야 하는 바그너 작품의 높은 난이도를 감안해도 2막과 3막에서 들려온 괴성의 고음과 호흡 조절 실패는 관객들의 귀를 괴롭혔다. 지난 6월 부산 콘서트홀 <피델리오> 무대에서도 드러났던 그의 음성의 문제는 이번 공연에서 한층 심해졌다. 또 한명의 트리스탄, 스튜어트 스켈턴 역시 설득력이 떨어졌다. 비대한 체격으로 거동이 불편한 그의 소극적 움직임이 낭만적 영웅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메르키가 코트부스 극장에서 연출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A팀)와 테너 브라이언 레지스터(B팀)를 기용한 바 있다. 연출자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가수를 기용하는 오페라 산업의 관행이 캐스팅의 배경인 것은 이해하겠으나, 그가 신뢰한 두 성악가가 모두 국립오페라단의 무대에서 성공하지는 못했다.



800석 규모의 코트부스 오페라 무대와 2300석의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무대 크기를 간과한듯한 부분들도 이어졌다. 주요 장면에서 성악가들이 지휘자 앞에 일렬로 서서 중창하는 장면이 반복됐다. 특히 ‘부부나 연인 관계의 성악가가 소화해야 한다’라고까지 일컫는 2막의 이중창 장면은 사랑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국 성악가들의 활약이 빛났다. 마르케 왕을 맡은 베이스 박종민은 등장과 동시에 무대를 압도했다. 2막 독백에서 그는 자의 충신과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왕의 고뇌를 풍부한 성량과 깊은 저음으로 표현했다. 3막에서 배신을 당했음에서도 그들을 직접 벌하지 않은 왕을 노래한 박종민의 가창에서 바그너가 기억한 오토 베젠동크의 인상을 알 수 있었다. 브랑게네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효나도 안정적인 호흡과 표현력으로 작품의 무게 중심을 단단히 지탱했다.




오페라의 음악을 책임진 츠베덴은 등장부터 달랐다. 그는 관행처럼 등장 박수를 받는 방식을 배제하고 장내가 암전된 후 조용히 지휘대에 올라 바로 전주곡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음악의 긴장과 감정선이 연결되는 지극히 음악을 위한 연출이었다. 홍콩필과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녹음으로 2019년 영국 그라모폰 뮤직 어워드 ‘올해의 오케스트라상’을 수상한 츠베덴은 빠른 전개와 조직적 긴장감을 강조하는 해석을 선보였다. 바그너 특유의 장대한 서사가 늘어지지 않도록 견고한 구조를 유지했고, 특히 3막 이졸데의 아리아에서는 A팀 포스터에게는 템포를 직접 이끄는 반면, B팀 바이소바에게는 호흡의 자유를 허락하며 유연한 지휘를 선보였다.

장시간 이어지는 공연 내내 서울시향의 연주는 안정적이었다. 특히 관악 파트가 제 역할을 해냈다. 2막 도입부 호른 군의 중주는 완성도 높은 음정과 따뜻한 울림을 들려주었고, 베이스 클라리넷은 마르케 왕 독백의 심리적 무게를 단단히 지탱했다. 3막의 잉글리시 호른과 트럼펫은 츠베덴의 디테일한 지휘 속에서 기술적으로 완벽한 솔로를 펼쳤다. 인터미션 40분 동안 쉬지 않고 연습하던 연주자들의 성실함이 무대에서 그대로 빛을 발했다.

국립오페라단(단장 최상호)은 바그너 오페라가 전통적 무대와 현대적 해석이 공존하며 다양하게 상연되는 독일과 달리, 이번 공연이 국내에서는 첫 전막 초연이었다는 점을 조금 더 세심하게 고려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콘월로 향하는 배를 우주선으로 설정하고, 주인공들에게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를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힌 연출, 그리고 트리스탄의 상처에서 형광 노란색 액체가 흘러나오도록 한 설정은, 바그너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게 자칫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인간성의 왜곡’으로 느끼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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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