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대극장. 극장이 문 닫는 월요일 밤, 이곳 로비에서는 시간의 질서를 뒤흔드는 장면이 펼쳐졌다.
로비의 벽면 가득 투영된 영상 속에는 20대 시절의 무용수들이 전력을 다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바닥을 박차고, 관절을 꺾으며 공간을 강하게 밀어내는 에너지가 화면을 채우는 동안 바로 그 아래 로비에서는 50대가 된 무용수들이 춤추고 있었다. 기록된 영상과 살아 있는 몸 사이에 시간이 겹쳐지며 과거와 현재가 충돌했다. 관객들은 숨죽인 채 무대에 빨려 들어갔다.
현대무용 안무가 안애순(66)의 이머시브 리서치 프로젝트 ‘순간편집’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객석을 비우고 극장 전체를 무대로 삼은 이번 프로젝트는 1층 로비에서 시작해 3층 스튜디오 다락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이동형 퍼포먼스다. 3일 첫 무대를 마친 안무가를 서울 이태원에서 만났다.
“영상 속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며 춤추는 무용수들을 바라보면서 울컥했어요. 그들끼리도 ‘저렇게 예쁘고 젊었구나, 너는 여전하네’라며 서로 칭찬하더라고요. 20년 동안 지켜온 무대를 다시 확인하는 감정이 움직임을 통해 드러났죠.” 그는 과거의 재현이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지금의 몸으로 새롭게 재탄생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애순은 40여 년간 한국 고유의 미학을 현대무용으로 재해석하며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켜 왔다. 1985년 안애순댄스컴퍼니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안무 창작을 위주로 활동했다. ‘카르마’(1990), ‘씻김’(1992) 등 초기작엔 한국 무용과 전통 제의를 무용에 담았다. 20대에 무용단을 세운 그의 작품은 학생작이나 첫 시도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후 ‘행복의 권리’(2003), ‘불쌍’(2009), ‘몸쓰다’(2022)를 비롯해 최신작 ‘행플러스마이너스’(2024)까지 지속적으로 레퍼토리를 발표했다. 자신이 만든 안무에는 절대 무용수로 서지 않는다.
안애순은 이번 프로젝트를 ‘공연’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 “공연자와 관객의 거리를 두는 극장의 엄숙함을 없애고 싶었어요. 경계 없는 무대를 선택했고, 그곳이 로비였습니다.”
대부분의 극장이 쉬는 월요일 밤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간이 비어 있는 순간에 극장을 다시 깨우고 싶었어요.” 실제로 1, 8, 15일 3회에 걸쳐 열리는 이번 프로젝트는 클럽과 파티의 감각을 차용해 관객을 움직임의 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로비 한쪽에는 와인바가 마련되고 DJ가 틀어주는 음악 속에 관객들은 극장을 마음껏 돌아다닌다. 2층 전시 공간에는 아카이브 영상과 함께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를 함께 살아낸 중견 무용가들의 인터뷰가 상영된다. “미술관에는 몸의 에너지가 없죠. 1층과 3층에서 전달되는 신체적 에너지로 2층 전시 공간을 감싸고 싶었어요.”
3층 스튜디오 ‘다락’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쇼케이스가 이어졌다. 로비에서 과거가 되살아났다면 다락에서는 미래가 만들어지는 셈. 다락에선 최근 안애순과 새롭게 연을 맺은 7명의 무용수가 한 명씩 독무를 이어갔다. 안애순의 메소드를 해체하고 본인의 감각으로 재조립하는 실험이었다.
안애순식 ‘파티 무용’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는 22년 전 아르코소극장에서 발표된 ‘행복의 권리’에서도 있었다.
“이제야 이머시브 공연이 화제라고 하지만, 무용계는 오래전부터 관객과 공연자의 경계를 허물어 왔어요. 컨템퍼러리 예술은 시대의 감각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몸은 시대의 증인이고요. 왜 이런 몸짓이 나오는지, 왜 이런 음악이 필요한지 질문하는 게 현대무용이죠. 형식에 갇히면 그게 현대무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순간편집’은 안애순의 회고전이 아니다. 극장과 관객의 관계를 다시 묻는 실험이고, 신작을 향한 창작의 출발점이다.
‘순간편집’은 오는 8일과 15일, 월요일 밤의 극장을 두 번 더 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기록과 현재, 무용수와 관객, 몸과 시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현대무용이 왜 지금 여기에 필요한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