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이탈리아의 과거이자 미래…투자 대비 3.75배 경제효과"

입력 2025-12-04 10:13
수정 2025-12-04 11:21


"우리는 문화였고, 지금도 문화며, 앞으로도 문화가 될 것이라고 항상 말합니다."

한국과 이탈리아 양국간 콘텐츠 협력 방안 논의차 방한한 루치아 보르곤조니(48) 이탈리아 문화부 차관은 2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진행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국의 정체성을 이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보르곤조니 차관은 콘테와 드라기 정부를 거쳐 현 멜로니 정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문화 정책의 핵심을 담당해 왔다. 그는 기존의 문화유산 보존을 넘어 '창의 산업' 육성과 '첨단 기술'의 결합을 새로운 정책 화두로 제시했다.

보존에서 '창의 산업'으로

이탈리아는 로마와 폼페이 등 찬란한 고대 유적은 물론 패션, 디자인, 영화 등 현대 창의 산업까지 선도하는 세계적 문화 강국이다. 압도적인 문화유산에 이탈리아 특유의 미적 감각과 장인 정신을 더해 독보적인 국가 브랜드를 구축했다.

이탈리아 문화부의 역할은 이러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확장됐다. 과거에는 문화유산 보호에 집중했으나, 현재는 영화, 패션, 디자인, 사진 등 창의 산업 전반을 관장한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의 유산 확보 예산도 대폭 늘렸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고택이나 사진, 그림 등을 정부가 직접 매입해 보존하는 식이다. 관련 예산은 지난해 3700만 유로(약 633억 원)에서 올해 6000만 유로(약 1026억 원)로 증가했다.

문화 정책의 또 다른 핵심 축은 '청년'과 '교육'이다. 보르곤조니 차관은 "많은 청년이 변호사 같은 전통적인 전문직을 꿈꾸지만, 실제 이탈리아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분야는 영화 세트 디자인, 의상, 미술 등"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오스카상 수상 실적이 이를 증명한다"며 "패션업계의 하이엔드 의상을 만드는 장인들이 대부분 이탈리아인이라는 점을 알리고, 청년들이 시나리오 작가나 기술 전문가 등 창의 산업군으로 진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I 시대의 규제 "예술가 권리 보호"

인공지능(AI) 기술 도입과 관련해 이탈리아는 선제적인 규제책을 마련했다. 핵심은 창작자의 권리 보호와 인간 고유성의 존중이다. 배우의 초상권이 무단으로 AI 학습에 사용되지 않도록 별도 계약을 의무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일자리 보호를 위해 강력한 안전장치를 뒀다. 그는 "과거에는 배우가 현장에 없으면 제작사가 AI로 장면을 재구성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경우에도 배우에게 동일한 출연료를 지급하도록 법제화했다"고 설명했다. 제작사가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AI를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보르곤조니 차관은 "AI는 유용한 도구일 뿐 예술가를 대체할 수는 없다"며 "AI는 규칙에 의존하지만, 인간은 논리적 한계를 넘어 '반항적'이고 예기치 않은 선택으로 예술을 창조한다"고 강조했다.

위성과 드론이 지키는 문화유산

유산 관리 방식도 첨단화됐다. 이탈리아는 2018년부터 위성과 드론을 결합한 다중 모니터링 시스템을 도입했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시작해 현재는 콜로세움, 볼로냐의 탑 등으로 확대 적용 중이다.

이 시스템은 자연적 요인에 의한 손상과 붕괴 위험을 실시간으로 감지한다. 그는 "위성을 통해 단순 자연 현상과 붕괴 위험을 구분해 사전에 손상을 막는 예방 중심 체계"라며 향후 모든 유적지로 시스템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과 콘텐츠 협력 확대

이번 방한 기간 보르곤조니 차관은 한국 정부 및 CJ ENM 등과 만나 파트너십 강화에 주력했다. 그는 "이탈리아 제작자들은 '기생충'을 알고, 한국 제작자들은 펠리니 감독을 안다"며 "넷플릭스 이탈리아 차트에 한국 콘텐츠가 항상 상위권에 있는 것은 양국의 내러티브와 정서가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일본과의 공동 제작 프로젝트로 성과를 거둔 이탈리아는 한국을 주요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 그는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모든 시청각 장르로 교류를 확대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입증된 경제·사회적 효용

보르곤조니 차관은 문화산업 육성 정책이 창출하는 경제적·사회적 가치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했다. 그는 "이탈리아 정부 분석에 따르면 공공 문화 부문에 투자한 1유로는 3.75유로의 경제적 효과로 회수된다"고 밝혔다. 문화 예산이 단순한 비용이 아닌 고효율 투자라는 설명이다.

사회적 효용도 뚜렷하다. 이탈리아는 의사가 우울증 환자나 고령자에게 약물 대신 음악회, 박물관 관람 등을 권하는 '문화 처방(Cultural Prescription)' 제도를 도입했다. 보르곤조니 차관은 "이 제도를 선제적으로 시행한 영국의 경우 대상자의 응급실 및 병원 방문율이 약 37% 감소했다"며 "아름다움이 가진 치유의 힘이 증명된 사례"라고 강조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