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부활’ 나선 일본, 다시 원전 돌린다[글로벌 현장]

입력 2025-12-17 11:07
수정 2025-12-17 11:08


반도체산업 부활에 나선 일본이 안정적 전력 공급을 위해 원자력발전소 재가동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 ‘반도체 연합군’ 라피더스의 홋카이도 공장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따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14년간 악몽에 시달렸지만 다시 ‘원전 대국’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부활 나선 일본
라피더스는 2022년 도요타, 키오시아, 소니, 소프트뱅크 등 일본 8개 대기업이 설립한 반도체 연합군이다. 올해 가동을 시작한 홋카이도 1공장에서 2027년 하반기 2나노(nm·1nm=10억분의 1m)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업계 양산 기술은 3나노인데 삼성전자와 대만 TSMC는 2나노 이하 양산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일본은 40나노 수준에 머물러 있다. 1980년대 반도체 세계 1위였던 일본은 2000년대 들어 미세화 경쟁에서 한국, 대만에 밀리며 주저앉았다.

라피더스는 2027년 홋카이도에 2공장을 건설해 1.4나노 생산까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내년부터 1.4나노 연구개발을 본격화한다. 2029년 1.4나노 양산이 목표다. 1.4나노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로봇, 자율주행차 등의 두뇌로 쓰일 전망이다.

다만 라피더스에는 2나노의 벽도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 미국 인텔도 첨단 제품 수율 향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라피더스는 도전적 목표를 제시해야 장기적인 고객 확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일본 정부는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다. 2027년까지 라피더스에 1조 엔 이상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이를 더한 누적 지원액은 2조9000억 엔에 달하게 된다. 정부와 별도로 민간 출자 및 정부 보증을 통한 민간 융자도 계획하고 있다. 민관 투입 총액은 2031년까지 7조 엔에 달할 전망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은 경제안보상 중요한 첨단 반도체를 우대할 방침이다.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산업상은 라피더스에 대해 “국익을 위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국가적 프로젝트로 계속해서 성공을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원전 잇따라 재가동 채비
반도체 부활엔 전력이 필수다. 라피더스 공장이 위치한 홋카이도는 원전 재가동에 속도를 내고 있다. 스즈키 나오미치 홋카이도 지사는 올해 7월 원자력규제위원회 안전 심사에 합격한 도마리 원전 3호기 재가동을 용인하겠다는 방침을 최근 표명했다.

도마리 원전 3호기는 2009년 가동을 시작한 일본 내 최신 원전으로 출력은 91만2000kW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자 ‘탈원전’ 바람에 휩쓸려 2012년 5월 가동을 중단했다.

홋카이도는 도내 라피더스 공장과 데이터센터 등이 들어서며 전력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도마리 원전 주변 기초지자체 역시 재가동에 동의할 것으로 관측되자 운전 재개를 허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홋카이도전력은 방조제 공사 등을 마친 뒤 2027년 이 원전을 재가동할 계획이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새로운 안전기준을 마련했고 2015년 규슈 센다이 원전 1호기를 재가동하며 ‘원전 국가’로 돌아왔다. 작년 12월엔 혼슈 시마네 원전 2호기를 재가동하며 가동이 가능한 총 36기의 원전 중 재가동 원전을 14기로 늘렸다.

올 들어선 원전 확대 방침을 공식화했다. 2월 각의에서 에너지기본계획을 개정하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명시한 ‘원전 의존도를 가능한 한 줄인다’는 문구를 삭제하고 ‘최대한 활용’ 방침을 밝혔다. 2040년 전력 구성비 목표로 재생에너지 40∼50%, 원전 20%, 화력 30∼40%를 제시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도 원전 재가동에 나섰다. 니가타현에 위치한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이다. 하나즈미 히데요 니가타현 지사는 최근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6·7호기 재가동을 용인한다고 밝혔다.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은 1985년 도쿄전력이 운전을 시작할 당시 세계 최대 원전이었다. 총 7기 원자로에 발전용량은 총 821만2000kW에 달했다. 이번에 재가동을 준비하는 6호기와 7호기 용량은 각각 135만6000kW다. 도쿄전력은 우선 6호기를 먼저 재가동한 뒤 테러 대비 시설 공사가 완료되는 대로 추후 7호기도 재가동할 예정이다. 새 원전 건설도 추진
일본은 새 원전 건설도 추진하고 있다. 간사이전력이 혼슈 후쿠이현 미하마 원전 부지에 신규 원전을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간사이전력은 동일본 대지진 직전인 2010년 노후한 미하마 원전 1호기를 대체할 원전을 짓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중단했다.

미하마 원전 1·2호기는 폐기가 결정됐고 지금은 3호기만 가동되고 있다. 간사이전력은 후쿠이현에서만 원전 7기를 가동하고 있는데 그중 5기는 운전을 개시한 지 40년이 넘었다. 일본에서 원전은 60년 이상 가동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설에 20년가량 걸려 간사이전력이 새 원전 건설에 착수하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은 원전 인재 확보에 나서고 있다. 간사이전력과 차세대 원자로를 공동 개발하는 미쓰비시중공업은 올해 원전 사업과 관련해 역대 최다인 200명 이상 채용했다. 이 업체의 원전 사업 분야 직원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에 약 5000명에 달했지만 사고 직후 약 1000명을 감원했다. 지금은 4400명 수준으로 늘었다.

또 다른 중공업 업체인 IHI도 원전 사업 분야 직원을 현재 약 800명에서 2030년에는 1000명 수준으로 증원할 계획이다. IHI는 일본에서 설치가 끝난 원자로 재가동,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공장 건설 지원 등 업무를 주로 수행하고 있다.

일본에 원전 관련 인력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일본 원자력산업협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관련 기업의 약 50%가 “인력이 필요 인원보다 20∼30% 정도 부족하다”고 답했다. 지난해 일본 대학의 원자력 관련 학과·전공 입학자 수는 177명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가장 적었다. 시선 곱지 않은 중국
일본 원전에 대한 한국, 중국 등 주변국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한국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후쿠시마현 등 8개 현에서 생산된 수산물 수입을 규제하고 있다. 일본은 수산물 수입 재개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국은 일본과 갈등이 고조되며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다시 막아섰다.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 유사시 일본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이후 일본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중국이 추가 제재 카드를 꺼낸 것이다.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중국 측에 원활한 수출을 요구해 갈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에선 다카이치 외교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카이치 총리는 최근 의회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야당 당수와 토론회를 가졌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노다 요시히코 대표는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시사 발언으로 일·중 관계가 냉각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독단전행이 아니었나. 책임을 느끼느냐”고 추궁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노다 대표의 질의에 “중국과 대화를 통해 포괄적인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며 “국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제 책임”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대만 유사시 개입 시사 발언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질문을 받아 그 범위 내에서 성실히 답변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대만과는 비정부 간 실무 관계로 유지하고 있다”며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일본은 대만에 관한 모든 권리, 권한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중·일 갈등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다카이치 총리의 행보가 주목된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