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게/어찌 바람뿐이랴." 이렇게 시작되는 고재종 시인의 시 '감나무 그늘 아래'는 지난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응시한 수험생이라면 한 번씩 정독했을 작품이다. 2026학년도 수능 국어영역에 출제됐기 때문이다.
고 시인은 최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진행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읽기 쉬운 시라서 문제로 나온 게 아닐까 싶다"며 웃었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나고 자란 그는 농촌의 정경 속에서 일상의 언어로 삶의 애환과 생명의 경이를 노래해 왔다.
"시가 수능에 나온 뒤로 사람들이 연락을 많이 하는데 별 관심 없다"던 그는 스무살 무렵 수험생들이 자신의 시를 공감했을지를 궁금해했다. "그 시는 젊어서 연인이 떠난 뒤 상처를 극복하고 성숙하는 모습을 감 익는 모습에 빗대 쓴 거예요. 그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한창 누구를 좋아하고 또 그러다가 헤어질 때니까 애들한테 와닿았을지…."
'작가도 자기 작품이 수능에 나오면 틀린다'는 건 문단의 오랜 농담이다. 고 시인이 문제를 직접 풀면 맞출 수 있을까. 짓궂은 질문에 시인은 "돋보기를 놓고 왔다"며 문제지를 챙겨가 며칠 뒤 연락을 줬다. "돋보기도 놓고 갔지만 실은 요즘 학생들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못 맞출까 봐 안 풀었는데, 찬찬히 읽으면 다 풀겠던데요? 시험장에서는 시간에 쫓길 테지만." 고 시인이 시 해설과 함께 불러준 선지는 줄줄이 정답이었다. 그는 "시는 인공지능(AI)이나 영상이랑 달리 찬찬히 들여다봐야 하는 글이라 요즘 젊은이들이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며 "꼭 내 시를 읽어달란 게 아니라 자기 인생에 와 닿는 시를 찾아보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문학을 독학했다"는 그의 시가 대입 시험에 출제된 건 아이러니다. 고 시인은 담양농고를 중퇴한 뒤 198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는 "9남매였는데 집이 워낙 가난해 마음껏 공부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내년이면 고희를 맞는 그는 소문난 다독가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온라인 서점 신간 목록부터 훑고 매달 20~30권을 사 읽는다. 고 시인은 "어쩌면 책을 많이 읽는 습관이 생긴 건 독학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현재 그는 책 약 2만권이 쌓인 고향 집필실에서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등단 40주년을 맞은 걸 기념해 '감나무 그늘 아래'를 비롯해 시 150편을 엄선한 시선집 <혼자 넘는 시간>을 올해 펴냈다. 최근 영산강 유역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시인들과 함께 <영산강 시인들>을 출간했다. 지난달 제7회 이용악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산강 시인들> 북토크에 참석차 오랜만에 서울에 온 그는 "길거리에서 나 혼자 느리게 걷는 걸 보니 내가 촌놈이긴 한 것 같다"며 웃었다. 농담 끝에 그는 지역에서 문학 활동을 지속해온 데 대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고 시인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은 광주 대표 종합문예지 '문학들' 창간에 참여해 초대 편집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지역에 기반을 둔 문예지는 지역 작가들을 조명하고 지역 문제에 천착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를 수식할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은 '농부 시인' '이장 시인'이다. 하지만 고 시인은 "경계 없는, 자유로운 시인으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했다. "농사를 지어보면 땅과 인간, 모든 게 연결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문학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 비(非)인간의 목소리까지도 전할 줄 알아야 해요. 건강이 허락만 한다면 계속해서 목소리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쓰려고 합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