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비트코인 보유사 스트래티지 등 암호화폐를 사들여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써온 ‘크립토 트레저리’(crypto treasury·암호화폐 금고) 기업들이 휘청이고 있다. 비트코인이 폭락하면서 줄줄이 위기에 빠졌다. 암호화폐를 담보로 대출받아 자사주를 매입하는가 하면 아예 코인을 매도하는 기업도 증가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의 암호화폐 매도가 늘며 코인 가격 하락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세일러의 ‘녹색 점’에 불안 커져‘비트코인 전도사’ 마이클 세일러 스트래티지 회장은 1일 X(옛 트위터)에 “우리가 ‘녹색 점’을 추가하기 시작하면 어떨까”라는 글을 남겼다. 비트코인 커뮤니티에선 이를 두고 세일러가 매주 공개하는 비트코인 매수량과 보유량 발표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세일러는 지난 1년간 거의 매주 ‘오렌지색 점’이 찍힌 차트를 올리며 다음날 비트코인 추가 매입 소식을 알려 왔다. 코인데스크는 “녹색 점이 비트코인 매입 대신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주 가치를 끌어올리겠다는 신호일 수 있다”고 전했다.
스트래티지는 창사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세일러는 그동안 주식을 고가에 발행해 비트코인을 사들였다. 비트코인 가격이 오를 땐 회사 주가도 상승세를 탈 수 있었다. 지난 7월까지만 해도 이런 전략은 유효했다. 회사의 시가총액이 보유한 비트코인 가치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비트코인 가격이 흔들리면서 스트래티지 주가는 7월 고점 대비 약 60% 폭락했다.
JP모간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스트래티지가 MSCI 미국, 나스닥100 등 핵심 벤치마크지수에서 제외될 위험이 있다”며 “주요 지수에서 빠지면 상장지수펀드(ETF) 자금 이탈로 인한 유동성 감소와 자금 조달 비용 상승으로 이어져 투자 매력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트래티지는 현재 약 65만 개의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기업이 보유한 비트코인의 70%에 달한다.
비트코인은 이날 오후 5시 현재 24시간 전보다 5% 이상 급락한 8만655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오후 1시께는 8만6000선이 붕괴되기도 했다. 암호화폐 업체 팔콘X의 트레이딩 책임자 션 맥널티는 “비트코인 ETF로의 자금 유입이 미미하고, 저가 매수도 사라졌다”며 “12월에도 암호화폐 하락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코인 담보로 자사주 매입 나서‘제2의 스트래티지’를 꿈꾸며 암호화폐를 사재기하던 상장사들도 위기에 빠졌다. 바이오테크 기업인 나스닥시장 상장사 180라이프사이언스는 8월 이더질라로 사명을 바꾸고 이더리움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가는 8월 고점 대비 6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고 회사 시가총액은 2억600만달러까지 쪼그라들었다. 회사가 보유한 3억달러 상당의 이더리움 가치보다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더질라는 지난주 보유한 이더리움을 담보로 8000만달러를 대출받았다. 회사는 이 자금을 총 2억5000만달러 규모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보탤 계획이다.
골프카트 제조업체 볼콘도 7월 사명을 엠퍼리디지털로 바꾸고 주가가 폭등했지만 최근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다. 이 회사는 자사주 매입을 위해 8500만달러의 차입을 진행했다.
일본 최대 비트코인 보유 기업 메타플래닛 주가는 6월 고점 대비 80% 폭락했는데, 회사는 비트코인을 담보로 1억3000만달러의 대출을 확보해 자사주 매입 등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반도체 기업 시퀀스는 지난달 1억달러어치 비트코인을 처분해 부채를 상환했다.
월가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자사주 매입과 코인 매도 움직임이 ‘암호화폐 금고 모델’의 수명이 다했다는 증거로 보고 있다. 엘리엇 천 아키텍트파트너스 애널리스트는 “이 같은 기업들의 사업 모델은 보유 암호화폐 가치 상승 속도보다 기업의 시장 가치가 더 빨리 오를 것이란 전제 위에 세워졌다”며 “암호화폐를 사는 데 써야 할 자금을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는 것은 크립토 트레저리 개념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애덤 모건 매카시 카이고 애널리스트는 “기업들이 앞다퉈 코인 매도에 나서면서 상황은 더 나 빠질 것”이라며 “기업들의 코인 매도가 코인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