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자 한동안 퇴장 압박을 받던 원자력이 빠른 속도로 재부상하고 있다. 주요국이 잇따라 원전 확대 정책을 내놓고, 중단된 원전의 수명 연장과 재가동에 나서면서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 각국 원전 정책 ‘들썩’
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확산 등으로 인해 글로벌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확산 등을 주된 요인으로 꼽으며, 글로벌 전력 수요가 2035년까지 2024년 대비 40~50% 급증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의 원전 회귀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향후 10기의 대형 원전 착공을 목표로 내걸고, 소형모듈원자로(SMR)와 차세대 고급 원자로(Gen-IV) 상용화를 위한 대규모 지원에 나섰다. 여기에 폐쇄된 원전의 재가동을 촉진하는 정책도 병행하고 있다. 핵심은 최근 공개된 800억달러 규모의 원전 투자 패키지다. 첫 적용 사례는 컨스텔레이션 에너지의 스리마일섬 1호다. 미국 에너지부가 10억달러 대출을 신속 승인했다. 컨스텔레이션은 이 원전을 이르면 2027년 재가동해 마이크로소프트 AI 데이터센터에 835㎿, 약 80만 가구에 공급 가능한 탄소 제로 전력을 제공할 계획이다.
아시아에서도 원전 정책이 빠르게 수정되고 있다. 일본 당국이 올해 안에 도쿄전력의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6호기 재가동 승인 절차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 원전이 재가동하면 2011년 후쿠시마제1원전 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이 소유한 원전 첫 재가동 사례가 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재가동이 지지부진했던 일본에서 세계 최대 규모 원전의 재가동은 정책 기조 전환을 의미하는 ‘정치적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인도의 경우 노후 설비 유지·투자를 위해 30년 이상 가동된 원전에 kWh당 0.5루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새로운 가격정책을 도입했다. 인도 정부는 2047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 8.8GW에서 100GW로 확대한다는 장기 목표를 제시했으며, 민간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원자력 관련 법 개정도 추진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원전을 새로 짓는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은 현재 30기 이상의 원전을 동시에 건설 중이며, 올해만 2000억위안 규모의 신규 원전 10기를 승인했다. 장저우 원전 등 주요 프로젝트는 5년 만에 완공될 정도로 건설 속도를 높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대규모·반복적 건설이 기자재 가격 하락, 전문 인력 확충, 공급망 표준화 등 ‘학습효과’로 이어지면서 중국이 다른 국가가 따라오기 힘든 구조적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보고 있다. ◇ 2050년까지 원전 용량 3배로
이러한 원전의 부활 흐름을 토대로 향후 글로벌 원전 발전 용량은 대폭 확대될 전망이다. 세계원자력협회(WNA)는 최근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 에너지 데이 행사에서 ‘2025 세계 원자력 전망’을 공개하며, 이 같은 흐름을 공식화했다. WNA는 각국 정부의 공식 목표를 합산할 경우 2050년 글로벌 원전 용량은 총 1363기가와트시(GWe)로 추산되며, 여기에 가동 가능성이 높은 잠재 사업까지 포함하면 1428GWe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COP28·COP29를 거쳐 31개국이 합의한 ‘2050년 1200GWe 달성’ 목표를 200GWe 이상 웃도는 수치다. 현재 31개국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약 440기, 총 397GWe 규모다. 지난해 전세계 원전 발전량은 2667테라와트시(TWh)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WNA는 낙관적인 전망만 내놓지는 않았다. 목표 달성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건설 속도다. 보고서는 목표 시기인 2050년을 맞추려면 신규 원전의 전력망 연결 속도가 2030년까지 현재 대비 4배 이상 빨라져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원전 건설이 가장 활발했던 1980년대 중반의 최고 기록보다도 두 배나 빠른 속도다. 이를 위해서는 규제 절차의 효율화, 대규모 자금 조달 인프라 구축, 공급망 강화가 필수적이다. 특히 소형 모듈식 원자로(SMR) 등 차세대 기술의 조기 상용화와 전문 인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는 우라늄 채굴부터 연료 제조까지 이어지는 핵연료주기 전반에 대한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빌바오 이 레온 사무총장은 "저렴하고 안정적인 무탄소 전력을 24시간 공급하기 위해서는 규제 개혁과 함께 원자력 가치 사슬 전반에 걸친 저리 자금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