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1월 27일 16:46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국내 최대 부동산 자산운용사 이지스자산운용 인수전에서 흥국생명이 1조원이 넘는 ‘최고가’를 써낸 것으로 파악됐다. 태광그룹 차원에서 부동산 투자 역량을 그룹 안으로 끌어들여 금융·부동산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새로 짜겠다는 구상이 ‘1조 베팅’으로 구체화됐다는 평가다.
2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최근 진행된 이지스자산운용 본입찰에서 인수 가격으로 약 1조500억원 안팎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함께 제안서를 낸 한화생명과 중국계 사모펀드(PEF) 힐하우스인베스트먼트가 9000억원대를 적어낸 것과 비교하면 경쟁사보다 최대 2000억원 가까이 높은 금액을 제안한 것이다. 당초 시장에선 자본력이 탄탄한 한화생명이나 힐하우스가 1조원을 웃도는 금액을 제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막판에 흥국생명이 최고가를 써내며 판을 뒤집은 셈이다.
흥국생명이 이처럼 공격적인 베팅에 나선 배경에는 태광그룹의 사업 재편 전략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그룹 내 캐시카우인 섬유·통신 사업 성장성이 둔화된 가운데 장기 자금을 운용하는 생명보험과 국내 1위 부동산 하우스를 결합해 ‘대체투자 플랫폼’을 그룹 내에 내재화하려는 구상이다.
흥국생명은 최근 서울 종로 사옥을 리츠에 매각하고 후순위채 발행 등을 통해 수천억원대 유동성을 확보했다. 아울러 이지스자산운용에 자금을 출자한 연기금 및 공제회 등 핵심 출자자(LP)들과 접촉해 사전 교감에 나설 정도로 막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매각 대상은 최대주주 손화자 씨(지분 12.4%)를 비롯해 재무적 투자자(FI), 대신금융그룹, 조갑주 전 신사업추진단장 측이 보유한 지분 등 최대 98.8%다. 사실상 회사 전체를 넘기는 ‘전면 매각’인 만큼 매도인단은 인수가격을 최우선 판단 기준으로 삼되, 향후 규제 리스크 및 LP와의 관계까지 함께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흥국생명이 최고가를 제시하며 자연스럽게 우선협상대상자 1순위로 부상했지만, 실제 인수자로 낙점될지는 두고봐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근 서울지방국세청이 태광산업 등 일부 계열사를 상대로 세무조사에 착수한 점도 시장의 시선을 끈다. 다만 이번 세무조사 대상에 흥국생명은 포함되지 않은 데다, 조사 초점도 계열사 간 내부거래에 맞춰져 있어 이지스자산운용 인수전의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진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소액주주 반발을 샀던 교환사채 발행을 철회하는 등 태광그룹 차원에서 현 정부의 지배구조·시장질서 기조에 보조를 맞추려는 움직임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쟁 후보인 한화생명과 힐하우스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한화생명은 그룹 차원의 자본 여력과 규제 대응 능력을 내세워 ‘딜 종결성’ 측면에서 강점을 강조하고, 금융계열사 통합 전략을 통해 한화자산운용·한화에셋매니지먼트 등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힐하우스는 약 1000억달러(약 130조원)를 운용하는 글로벌 PEF로 아시아 주요 지역에서 실물자산 투자 트랙레코드를 강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만 외국계 자본 특성상 규제·여론, 환율·자본유출 변수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공식적인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발표 시점은 다음달 11일께로 알려졌지만, 업계에서는 조금 앞당겨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조갑주 전 단장이 당초 요구했던 ‘3개 자회사(이지스엑스자산운용·이지스투자파트너스·이지스아시아) 매각 제외’ 조건은 본입찰 이전에 공식 철회된 만큼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에 속도가 붙었다는 분석이다.
다만 업계에선 인수 가격뿐만 아니라 핵심 LP와의 파트너십을 어떻게 유지·연착륙시키느냐가 딜 성사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각종 공제회 등 국내 주요 기관투자가 자금으로 성장해온 하우스다. 현재 국민연금의 투자 잔액만 8조원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연기금 관계자는 “새 대주주가 LP와의 신뢰, 운용 독립성, 핵심 인력 승계 문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이번 딜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