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하고 늙어가던...인간 이순신, '우리들의 이순신'

입력 2025-11-27 11:43
수정 2025-11-28 12:49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1598년 11월 19일 노량 앞바다. 충무공 이순신은 도주하는 왜군을 쫓았다. 기나긴 전쟁이 끝날 참이었다. 갑자기 날아온 탄환이 그의 몸을 뚫었다. “지금 싸움이 급하구나. 부디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마라.” 유언에 따라 북소리는 계속 울렸다. 왜군이 궤멸하며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이순신은 한민족의 성웅(聖雄)이 됐다. 그 신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8일 개막하는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에는 신화 뒤의 얼굴이 있다. 일하고 아파하고 늙어가는 인간 이순신이다. 국보 15점, 보물 43점 등 총 369점의 유물이 그 증거다. 이순신 전시로 역대 최대 규모, 서울에서 이순신 종가의 유물 20건 34점 전체를 처음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떤다”문신(文臣) 집안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붓 대신 활을 들었다. 무과에 급제했지만 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좌천됐고, 함경도 변방에서 여진족과 싸우다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백의종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강직함과 유능함은 이미 조정에 알려져 있었다.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조정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파격 임명했다. 2년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으로의 10단계 초고속 승진. 전시는 1591년 2월, 만약의 사태를 준비하던 이순신의 기록으로 시작한다. 초입의 ‘조선방역(方域)지도’(국보)에 표시된 8도의 주현(州縣)과 수군 진영은 그가 목숨 걸고 지킬 나라의 생명줄이었다.



이순신은 배를 짓고 포를 쐈다. 전시실에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 도열해 있다. 전략은 이랬다. ‘당파(撞破)’. 대형 총통으로 거대한 화살을 쏜다. 나무로 만든 왜선의 외판이 깨진다. 물이 샌다. ‘분멸(焚滅)’. 배가 깨지면 탄환과 화살을 비와 우박처럼 퍼붓는다. 화약 무기를 쏜다. 배는 불탄다. 박물관 영상이 이해를 돕는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 앞바다를 덮쳤다. 부산이 무너지는 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분하고 원통하다.” 이순신은 말했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서막이었다.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은 조선의 첫 승리를 거둔다. 그간 준비하고 훈련한 대로였다. 한산도대첩에서는 학익진으로 왜군의 보급을 끊었다. 경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제 바다에서 싸우지 말라”고 명령했을 정도의 대승이었다.



이듬해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전시실에 국보 ‘이순신 장검’이 놓여 있다. 길이 197.5㎝. 사람 키보다 크다. 지휘용 칼이다. 칼날에 금입사(金入絲)로 박힌 글씨는 400년이 지나도 선명하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도다.” 아프고 고단했던 인간 이순신‘난중일기’(국보) 친필본 7책이 펼쳐져 있다. 임진년(1592)부터 무술년(1598)까지의 기록이다. 글씨는 흘려 쓴 초서체다. 배 위에서, 진영에서, 촛불 아래에서 썼다.

그는 날씨를 썼다. “비가 아주 많이 쏟아졌다. 모든 일행이 다 꽃비(花雨)에 젖었다.”(1592년 2월 23일) 늙어가는 몸을 썼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10여 가닥을 뽑았다. 희어지는 것을 어찌 꺼릴까.”(1593년 6월 12일) 아픔을 썼다. 아들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다.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또 타고 찢어졌다.”(1597년 10월 14일) 종이에는 감정이 날것 그대로 박혀 있다. 그는 자주 아팠고, 늘 고단했다. 위장은 쓰렸고, 식은땀을 흘렸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른 1597년 2월, 선조는 이순신을 파직했다. 그가 백의종군하는 사이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불탔다. 다시 통제사가 됐을 때 남은 건 배 열두 척뿐이었다. 선조는 육군에 합류해 미래를 도모하라고 했다. 이순신은 붓을 들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9월 16일 이순신은 명량에 출격한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그리고 크게 이겼다. 전시는 이 기적을 신화로 포장하지 않는다. 거센 물살, 필사적인 저항, 승리의 기록을 담담하게 나열할 뿐이다.

일본 측 유물도 나와 있다. 적의 시선에서 본 전쟁의 모습이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가문의 ‘울산왜성전투도’ 병풍에서는 수많은 조명 연합군이 왜군의 성을 포위하고 있다. 이순신 덕분에 가능했던 반격이었다. 일본 서쪽의 강자, 다치바나 무네시게 가문의 화려한 금박 장식 투구와 창은 조선군의 투박한 장비와 대조를 이룬다.



‘정왜기공도병’은 명나라 군대의 활약을 그렸다. 전반부는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후반부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던 것이다. 조선의 산하를 배경으로 그림 속에서 명나라 기병은 달리고, 왜군은 도망친다. 두 그림이 흩어진 후 이번에 처음으로 만났다. “시련 견뎌낸 인간의 기록”전시는 1598년 노량해전으로 향한다. 큰 쇳덩어리가 눈에 띈다. 노량해역에서 나온 지자총통의 조각이다. 깨지고 녹슬었다. 그 녹 속에 1598년 이순신이 잠든 겨울 바다의 소금기가 있다. 류성룡의 ‘징비록’(국보)과 오희문의 ‘쇄미록’(보물)은 전한다. 이순신의 죽음에 병사와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듯 울었다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순신을 다룬 주요 기록과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인간 이순신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고 그가 시련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라며 “이번 특별전이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3일까지.

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