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발동 조건 알 수 없게…국민연금 '환헤지 규칙' 다시 짠다

입력 2025-11-26 17:57
수정 2025-11-27 02:18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가 본격 가동되면서 국민연금이 다시 한번 ‘고환율 소방수’ 역할을 맡게 될지에 금융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부 안팎에선 국민연금이 규칙을 가다듬은 뒤 조만간 전략적 환헤지를 재개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실제 전략을 집행해야 하는 기금운용본부 내부에서는 운용 독립성과 손실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놓고 고심이 깊어지는 분위기다. ◇ 발동·해제 조건, 시장이 모르게 26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이르면 다음달 열릴 투자정책전문위원회에서 전략적 환헤지 관련 안건을 논의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정책위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 상정되는 안건 가운데 투자정책에 관한 사안을 사전에 검토·심의하는 기구다. 중장기 자산 배분과 위험 관리, 성과 평가체계 등 핵심 운용정책을 설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전략적 환헤지는 기금위 의결로만 발동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룰과 운용 방식은 투자정책위에서 먼저 다듬는다. 해외 자산의 몇 퍼센트까지 환헤지를 허용할지(현재 최대 10% 이내), 어느 수준의 환율을 ‘비이성적 오버슈팅 구간’으로 볼지, 발동과 중단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지, 시장에 불필요한 신호를 주지 않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집행할지 등이 모두 투정위 테이블에서 정리된다.

국민연금은 2022년 말 기금위 의결로 전략적 환헤지 제도를 도입했다. 올해 초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넘어서자 처음 제도를 가동했다가 환율이 1300원대로 되돌아간 지난 6월을 전후해 헤지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언론 보도와 증권사 보고서 등을 통해 “원·달러 환율 1480원 안팎을 전략적 환헤지 발동선으로 추정한다”는 분석이 잇따르면서 국민연금의 내부 기준이 상당 부분 시장에 공유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 내부에선 발동·해제 조건을 더 모호하게 설계해 구체적인 수치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상황별 재량권을 넓게 부여하는 방향으로 규칙을 개정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 환 손실 시 성과급 논쟁 재점화전략적 환헤지 규칙을 손보는 과정에서 손실 귀속과 성과 보상체계를 둘러싼 논쟁도 재부각될 전망이다.

애초 기금위는 전략적 환헤지로 발생한 손실의 책임을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위로 돌리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했다. 개별 운용역의 성과급에는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기금위 관계자는 “운용역 성과급은 벤치마크 대비 초과수익에 연동되는 구조인 만큼 전략적 환헤지처럼 정책적 판단에 따른 손익을 매니저 개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새로운 환헤지 전략 설계를 앞두고 일각에서 “국민연금 기금을 운용하다가 발생한 손실인데 성과 평가에서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맞느냐”는 주장이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 요구에 따라 환헤지를 집행한 뒤 손실까지 매니저 성과급에서 차감하면 누구도 집행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이 맞서고 있다.

국민연금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선물환을 통한 단기 헤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가 역외에서 달러·유로 등 여러 통화로 채권을 발행해 자산·부채 구조 전체를 묶어 환위험을 관리하듯 국민연금도 장기적으로는 펀딩과 헤지를 통합한 구조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역외채 발행은 법·제도 정비와 정부·한은과의 역할 분담 등 과제가 많아 중장기 과제로 분류되는 분위기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정치·정책 논리와 장기 기금 운용 원칙 사이에서 국민연금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향후 수년간 국내 연금·외환정책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