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커버 스토리 - 미리 보는 2026 ESG 키워드 ① 탄소배출권 시장
국내 탄소배출권 시장의 위상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관심이 집중된다. 2024년부터 탄소배출권과 연계된 ETF·ETN이 허용된 데 이어, 2025년 11월에는 증권사를 통한 위탁매매 제도가 도입되면서 탄소배출권 시장의 변화가 가팔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거래소는 2026년 상장을 목표로 배출권 선물시장 도입을 추진하고 있어, 그동안 환경규제 수단에 머물렀던 탄소배출권이 ‘투자자산’으로 인정받을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그동안 환경규제 수단에 머물렀던 탄소배출권이 ‘투자자산’으로 인정받을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시장 안팎에서는 탄소배출권 시장을 ‘자산시장’으로 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거래량이 여전히 미미하고 가격 변동성은 큰 반면, 정보공개와 법·제도적 기반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유럽의 EU 탄소배출권거래제(EU ETS)와 비교하면 가격 수준과 시장 깊이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는 점이 한계점으로 지목된다.
EU는 80유로대, 한국은 ‘저평가 논란’
글로벌 탄소시장을 대표하는 곳은 단연 EU ETS다. 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탄소배출권(EUA)은 2025년 11월 기준 1톤당 약 80유로대 초반에서 거래되고 있다.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상향과 석탄발전 축소,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강한 규제 패키지 도입이 가격을 떠받치는 요인으로 꼽힌다.
해외 주요 기관은 2030년까지 EU 배출권 가격이 계속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CIS는 2030년 EUA 가격을 90유로 수준으로, BNEF는 100유로 이상으로 전망한다. IPCC는 파리기후변화협약 목표 달성을 위해 2030년까지 1톤당 50~100달러 수준의 탄소가격을 전망한다.
이에 비해 국내 탄소배출권거래제(K-ETS) 가격은 이른바 ‘적정 탄소가격’으로 불리는 국제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는 상향됐지만, 시장가격은 아직 그 수준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도와 수급이 아직 거기에 맞게 조여지지 않은 단계라고 지적한다.
탄소배출권 가격은 일반 원자재와 달리 정부가 설계한 ‘총량(cap)’과 제도 변화에 크게 좌우된다. 유럽의 사례를 보면 EU는 ‘Fit for 55’ 패키지를 통해 연간 배출권 총량 삭감률(LRF)을 2.22%에서 4.22%로 끌어올리고, 시장 안정화 메커니즘(MSR)을 유지·강화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배출권이 과잉 공급되면 시장에서 물량을 자동으로 흡수하는 장치가 마련된다. 이 조치 이후 EUA 가격은 단기간에 큰 폭으로 상승했다.
특히 글로벌 탄소배출권 가격의 흐름을 결정할 핵심 변수에도 이목이 쏠린다. 우선 총량 규제와 유상 할당 정책이다. 우선 감축목표가 높아질수록 총량(캡)이 줄어들어 공급이 감소하고, 무상 할당 비중이 줄고 유상 할당이 늘어날수록 기업들이 시장에서 사야 하는 물량이 증가한다. 이는 수요를 키워 가격을 밀어 올리는 요인이 된다. 여기에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 이후 각국 ETS 연계 논의가 실제 제도로 이어질 경우 국내 K-ETS 가격도 국제 규제 수준과 수급 구조의 영향을 더 직접적으로 받게 될 전망이다.
새로운 자산군의 조건은…정보 투명성과 법·제도 인프라 중요
전문가들은 탄소배출권이 전통 자산군과는 상관관계가 낮다고 지적한다. 탄소배출권 가격은 기업 실적, 금리, 환율 같은 전통적 금융 변수보다는 감축목표 상향, 할당 방식 변화, 규제 패키지 도입 등 정책 요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때문에 주식·채권·원자재와는 다른 가격 패턴을 보이고, 포트폴리오 차원에서는 일부 체계적 리스크를 완화하는 헤지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크다는 분석이다. 감축목표와 2050 탄소중립, 석탄발전 감축 등 장기 정책 방향이 이미 국제적으로 합의돼 있다는 점도 중장기 관점에서의 투자 매력을 지지하고 있다.
투자자들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4차 계획기간(2026~2030년)이다. 이 시기를 대상으로 이미 확정된 총량, 무상·유상 할당, 이월 제도 등 세부 설계가 곧 KAU(국내 배출권) 가격의 향방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탄소배출권이 형식상 ETF·ETN·선물까지 갖춘 뒤 투자자들이 신뢰하고 참여할 수 있는 ‘진짜 자산시장’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정보 투명성과 법·제도적 안정성을 필수 조건으로 꼽는다. 우선 주식시장 수준에 가까운 실시간 시장 데이터 공개가 요구된다. 현재 가격, 거래량, 호가, 잔량 등 기본 정보가 충분히 공개되어야 시장 참여자들이 수급과 가격 신호를 제대로 읽고 대응할 수 있다.
기업 정보 공시의 강화도 필수 과제로 떠오른다.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기업의 기후·배출 관련 정보를 표준화해 공시할 경우 어떤 기업이 어느 시점에 얼마나 많은 배출권을 필요로 할지와 ‘시점별 수요’를 좀 더 정교하게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투자자와 금융기관이 배출권 가격과 수급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 기반 데이터가 된다.
법·제도 측면에서는 장기 로드맵의 법제화와 배출권의 재산권 지위 명확화도 핵심 과제로 꼽힌다. 정권 교체나 정책기조 변화에 따라 제도가 크게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한 상태에서는 장기적 투자와 금융상품 개발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또 배출권이 담보 설정이나 압류가 가능한 ‘재산권’인지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것도 시장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배출권을 법적으로 보호받는 자산으로 분명히 규정해야 은행 대출 담보와 구조화 상품, 파생상품 등 다양한 금융거래의 기초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외 탄소배출권 가격의 중장기 방향성에 대해서는 “규제 강화와 감축목표 상향이 지속되는 한, 구조적으로는 상방 압력이 우세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투자자 관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리스크로는 한결같이 유동성 문제가 꼽힌다.
K-ETS 시장은 여전히 참여자와 거래량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가격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호가 공백이 생기거나 특정 시점에는 매도·매수호가가 사실상 사라지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탄소배출권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이론상 산출되는 적정가나 해외시장과의 가격 비교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 가격에 얼마나 많은 물량을 사고팔 수 있는지를 늘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다. ETF·ETN, 향후 선물과 각종 구조화 상품도 결국 기초가 되는 배출권 시장의 유동성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
김준섭 KB증권 팀장은 “유동성·정보·법제도라는 세 축이 함께 자리 잡지 못할 경우 멋진 간판에 비해 위험과 불확실성이 과도하게 큰 시장으로 남을 수 있다”며 “국내 탄소배출권 시장이 진정한 의미의 자산시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그 답은 앞으로 몇 년간 제도 설계와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가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경 한경ESG 기자 esit91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