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출장길을 앞두고 서울의 한 면세점에서 쇼핑하던 40대 김모씨는 명품 스카프를 하나 사려다 깜짝 놀랐다. 직원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인근 백화점에 가면 같은 제품을 더 싸게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해줬기 때문이다. 김씨는 마음에 들었던 스카프를 매대에 올려두고 면세점을 바로 빠져나왔다.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해외 물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면세점의 가격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면세점들은 달러 기준 판매가를 낮추는 한편, 할인쿠폰을 지급하는 등 대응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이달 들어 신세계, 롯데, 신라 등 대형 면세점 3개사는 국내 브랜드 전 품목에 적용하는 기준환율을 기존 1350원에서 1400원으로 일제히 인상했다. 기준환율이란 국내 제품을 달러로 판매할 때 적용하는 환율이다. 기준환율을 높이면 국내 제품의 달러 표시 가격이 낮아져 할인 효과가 생긴다. 환율 급등으로 내국인 소비자들이 면세점 방문을 주저하자 기준환율을 올려 매출 하락을 방어하려는 시도다.
면세점들이 기준환율까지 올리는 것은 고환율 피해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면세점 업종의 올해 3분기 판매액은 3조68억원으로 작년 3분기(3조5576억원) 대비 15.5% 감소했다. 원·달러 환율이 6월 말 달러당 1350원 수준에서 최근 1470원대까지 급등해 달러화 표시 물품 가격이 급등했다.
면세점들은 기준환율 인상뿐만 아니라 대대적인 할인 혜택도 내놓고 있다. 롯데면세점은 이달 들어 ‘환율 내려올지니’라는 할인 프로그램을 내국인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다. 1000달러 이상 사면 구매 금액에 따라 최대 15만원의 적립금을 준다. 신세계면세점도 온라인몰에서 환율 보상 명목으로 할인 혜택을 기존 13%에서 15%로 높이고, 매장 구매에 따른 적립금 혜택을 강화했다. 신라면세점은 카카오페이로 결제하면 최대 10만원을 할인해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마케팅 비용이 늘어나 수익성이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매입 비용 부담도 커진다. 면세점은 해외 제품을 달러로 직매입하기 때문에 환율이 오를수록 면세점의 수입 원가가 높아진다. 환율 인상을 면세점들이 떠안으면 영업이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 3분기 중국 단체관광객 무비자 허용과 면세점들의 비용 절감 등으로 실적이 완만히 개선되고 있었는데 환율 변수가 생겼다”며 “4분기엔 다시 실적이 악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소비 트렌드 변화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9월 외국인 구매 인원은 101만2368명으로, 올해 처음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외국인 1인당 평균 면세점 매출은 77만원으로, 전년 동기(108만원) 대비 28.9% 감소했다.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 장소가 면세점에서 편의점, 다이소 등 한국인이 주로 방문하는 곳 위주로 바뀌고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보따리상인 ‘따이궁’이 줄어든 것도 매출이 감소한 원인”이라며 “고환율 때문에 내국인의 해외여행 자체가 줄어든 점도 매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