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면서 여기저기서 인사 발표와 함께 퇴직하는 분들의 소식이 들린다. 죽음을 피할 수 없듯, 퇴직도 피할 수 없는 직장인의 숙명이다. 그렇게 ‘은퇴 후의 삶’이 시작되지만 이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제력, 건강, 가족 관계 등 복잡한 개인사가 얽혀 있어 서로 묻기조차 조심스럽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의 상황에 공감하며 뒷이야기를 기다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은퇴 후 삶의 지혜를 1.3평 택시 안에서 기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얻곤 한다. 기사님 중 상당수가 한때 ‘김부장’이었다. 다양한 현장에서 수십 년을 보낸 이들은 마치 후배를 대하듯 은퇴 후 삶에 대한 조언을 자연스럽게 건넨다. 그 조언을 곱씹다가 은퇴 후 행복의 비결을 얻을 때가 많다.
어느 날 밤 10시가 넘도록 야근한 뒤 퇴근길에 피곤한 몸을 택시에 맡겼다. 조용히 운전하던 기사님이 불쑥 말씀하셨다. “열심히 일하는 건 좋지만, 결국 회사 나가면 남는 건 가족뿐이에요. 가족과 시간을 보내세요.” 그는 외국계 기업에서 30년 넘게 일하며 임원까지 지냈다. 잦은 출장으로 아이들 어릴 적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못내 아쉬워했다. 생각해 보면 직장에서 어떻게 일하든, 결국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가족이며, 가족은 ‘함께한 시간’을 바탕으로 나를 떠올릴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돈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줄어들고, 인간관계가 미치는 영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어느 대기업 부장 출신 기사님은 직장에서 얻은 가장 큰 자산이 ‘사람’이라고 했다. 특히 “진실한 직장 내 인간관계는 퇴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인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40·50대에 이런저런 모임을 찾고 옛 친구를 만나는 이유 역시, 노후에 인간관계 속에서 안정감과 행복을 누리기 위한 본능적인 발로일 것이다.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칠순 넘은 기사님은 주말마다 등산을 다닌다고 했다. 그는 “등산하는 하루를 기다리는 재미로 1주일을 버틴다”고 했다. 내 열정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취미는 어쩌면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흔히 ‘덕업일치’를 부러워하지만, 꼭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덕질’할 수 있는 취미야말로 풍요로운 노후의 비결임을 배운다. 나는 그 조언을 마음에 새겨 작년부터 러닝을 시작했는데, 삶에 분명한 활력소가 생겼다. 일이 바쁘다고, 시간이 없다고 미루기엔 취미는 인생에 중요한 윤활유다.
가족, 인간관계, 취미. 이 세 가지가 택시 안 ‘김부장’들이 현직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보석 같은 조언이다. 삶의 한 단계를 정리해 본 사람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역시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마음 편히 이야기 나눌 친구들이 곁에 있으며, 열정적으로 몰입할 취미를 가진다면 퇴직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