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스페셜 리포트 - 탄소감축을 위한 인센티브 ‘EPC’ ①
기업의 시간은 두 방향으로 동시에 흐른다. 하나는 2030년과 2050년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탄소중립의 시계, 다른 하나는 분기 실적과 주주가치를 기준으로 돌아가는 성장의 시계다. 탄소배출을 줄이라는 요구와 이익을 내라는 요구는 서로 다른 리듬으로, 그러나 동시에 박자를 맞추라고 요구한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의 탄소 정책은 주로 규제에 초점을 맞춰왔다. 배출권거래제(ETS)로 대표되는 의무감축제도는 국가 규모의 체계적 탄소감축을 위해 필요한 요소다. 다만 기업 입장에서 보면 이 제도는 실제로 탄소감축을 유도하는 요인이기보다는 ‘벌금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맞추는 기준’으로 작동하기 쉽다. 규제를 앞서가면서 설비를 교체하고 공정을 개선한 기업의 비용은 회계장부에서 대부분 비용(expense)으로 처리된다. 반대로 그로 인해 줄어들 미래 배출량과 리스크는 잘 보이지 않게 된다.
탄소감축 투자 결정의 어려움
그사이 탄소감축 속도는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에 비해 느리고, 기업이 체감하는 부담은 커졌다. 규제가 본격화되기 전 미리 움직인 기업일수록 초기 비용을 떠안게 되지만, 그 행동은 ‘책임 있는 이미지’ 정도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투자자 역시 탄소감축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실제 투자 결정에서는 “얼마를 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선명하게 답해주는 구조를 찾지 못해 망설인다. 탄소를 줄이는 것이 왜, 어떻게 기업가치와 연결되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이 아직 충분히 설계되지 않은 탓이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이런 문제의식에서 제안한 개념이 환경성과 인센티브, 즉 EPC다. EPC는 처음에는 ‘Environmental Protection Credit’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지만, 이후 논의를 거치면서 ‘Environmental Progress Credit’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고 있다. ‘보호’라는 결과뿐 아니라 ‘성과·진전(progress)’이라는 과정을 경제적 가치로 포착하겠다는 의도가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EPC는 단순히 새로운 크레디트의 이름이 아니라 탄소중립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시대를 맞아 규제에서 동기부여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시장 메커니즘이다.
사전적·동기부여형 정책과 시장으로의 이동
SK그룹이 설립한 비영리연구재단인 사회적가치연구원이 최근 세미나와 보고서에서 정리한 EPC의 최신 정의는 다음과 같다. EPC는 ‘미래 탄소감축 성과에 대한 미리 인센티브’다. 풀어서 설명하면 기업·기관·프로젝트가 향후 일정 기간 달성할 환경성과, 특히 탄소감축 성과의 ‘성과·진전’을 신뢰 가능한 방식으로 예측·평가하고, 그 가치의 일부를 현시점에 선제적 인센티브로 제공하는 제도 및 시장 메커니즘이다.
기존 탄소 정책이 과거 혹은 현재 배출량에 초점을 맞춘 ‘규제·사후 보상’ 시스템이었다면, EPC는 미래 환경성과를 경제적 가치로 재해석해 ‘사전적·동기부여형’ 정책과 시장으로 이동하려는 시도다. 핵심은 탄소감축이 발생한 뒤 보상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탄소감축이 발생하기 전 그 노력을 자산가치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EPC는 크레디트임과 동시에 탄소감축의 시간 구조를 바꾸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EPC가 현재 시장에서 존재하는 다른 시스템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첫째, EPC는 미래 환경성과의 ‘성과·진전’을 현재 가치로 평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과·진전’은 단순히 프로젝트 하나의 연간 감축량이 아니라 특정 기술·설비·공정 개선이 앞으로 수년에서 10여 년에 걸쳐 만들어낼 누적 감축 효과다. 규제 이전 단계에서 선제적으로 감축 투자를 실행하면 그 투자 결과로 미래에 발생할 감축 효과를 정량화하고, 여기에 보수적 탄소가격과 시장 전망을 적용해 현재 가치를 재구성한다. 배출권거래제(ETS)나 자발적 탄소시장(VCM)이 ‘이미 발생한 감축량’을 나중에 크레디트로 바꿔주는 구조라면, EPC는 ‘앞으로 발생할 추가 감축’에 대해 미리 가격을 매기는 구조에 가깝다.
둘째, EPC는 미리 인센티브(pre-incentive)를 제공해 행동을 ‘먼저’ 촉진한다. 대부분의 친환경 정책은 성과가 난 뒤 지원금을 주거나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하는 형태다. 하지만 기후테크 개발 과정이나 공정 전환은 초기 투자비용이 크고 회수 기간이 길다. “성과가 나면 나중에 보상하겠다”는 약속만으로는 의사결정이 쉽게 내려지지 않는다. EPC는 이 지점을 겨냥해 아직 성과가 완전히 실현되기 전 단계에서 일정 부분 인센티브를 앞당겨 제공한다. 여기서 인센티브는 꼭 현금일 필요는 없다. 향후 탄소 크레디트의 선구매 계약, 최소 탄소가격을 보장하는 CfD(Contracts for Difference), 금리인하, 공공보증, 세액공제권 등 다양한 형태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환경성과를 전제로 오늘의 자금과 혜택을 연결한다는 점이다.
셋째, EPC는 단순한 탄소 크레디트가 아니라 ‘성과·진전’에 대한 ‘권리·자산’이다. 여기서 C(credit)는 2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하나는 정책 기반 크레디트다. 정부와 공공부문이 EPC라는 틀을 통해 어떤 유형의 감축·전환을 인정할지, 어떤 기준과 절차를 거쳐 크레디트를 발행·관리할지 정한다. 다른 하나는 시장 기반 크레디트다. 발행된 EPC는 기업의 재무제표에서 일정한 자산으로 취급될 수 있고, 금융기관의 담보로 사용되거나, 다른 기업·정부·국제가격기구와의 거래를 통해 현금흐름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EPC가 지향하는 방향이 보다 분명해진다. EPC는 ‘탄소감축이라는 환경자본을 경제자본(economic asset)으로 전환하는 프레임’이다. 기존 탄소배출권이나 상쇄 크레디트가 어느 정도 이런 역할을 수행해왔지만, EPC는 보다 노골적으로 ‘규제 이전 단계에서의 행동’, 그리고 ‘기후테크·전환 투자’에 초점을 맞춘다. 단지 탄소만 보는 것도 아니다. EPC라는 이름 자체가 더 넓은 범위의 환경성과를 염두에 두기에 초기에는 탄소감축에 집중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생물다양성, 수질·대기, 순환경제 등으로 확장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현실에서는 EPC가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현될 수 있다. 먼저 정부, 공공기금, 혹은 민간 이니셔티브가 유망한 기후테크·전환 프로젝트를 발굴한다. 이후 기술 특성, 공정 데이터, 에너지 믹스, 기존 설비의 잔존 수명 등을 반영해 향후 예상되는 추가 감축량을 계산하고, 이를 기반으로 ‘환경성과 진전의 예상 가치’를 산정한다. 이때 기준선 설정과 추가성 검토, 시나리오 분석 등은 모두 독립적 검증·평가 체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평가된 가치의 일부를 EPC 크레디트로 발행하고, 이를 근거로 투자자와 금융기관이 선투자·선구매 계약을 체결하며, 기업은 전환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나중에 실제 감축 실적과 진전이 나타나면 미리 약속한 방식에 따라 성과를 정산하고, EPC 크레디트의 최종 가치와 귀속을 확정한다.
정리하면, EPC는 탄소감축의 시간 구조를 재설계하는 장치다. 지금까지는 ‘규제가 오고, 감축을 하고, 나중에 크레디트를 받는’ 순서였다면, EPC는 ‘감축의 진전을 예측하고, 먼저 EPC를 통해 자산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한 뒤, 규제와 시장이 뒤따라오는’ 구조를 지향한다. 이를 통해 기존 규제 중심 접근이 만든 한계, 즉 탄소감축 속도와 기업의 재무부담 사이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것이다.
해외에서 이미 시작된 ‘미리 인센티브’ 실험
EPC는 완전히 새로운 발명품이라기보다는 해외에서 이미 시작된 여러 실험을 하나의 논리로 묶어낸 개념에 가깝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이 정리한 해외 사례 중 특히 시사점이 큰 것은 캐나다 성장 기금(Canada Growth Fund), 넥스트젠(NextGen) 탄소제거 이니셔티브, 싱가포르의 트랙션(Traction)이다. 이들 사례는 정책 주체, 참여자, 대상 부문, 메커니즘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미래 환경성과를 현재 계약과 투자 결정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EPC와 궤를 같이한다.
캐나다 성장 기금은 정부가 탄소가격 리스크를 흡수해 민간투자를 끌어들이는 대표 사례다. 연방정부가 150억 캐나다달러 규모의 성장 기금을 조성하면서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70억 캐나다달러를 탄소감축 성과에 대한 선매입 계약에 배정했다. 탄소포집·저장(CCS)이나 청정 수소처럼 초기 투자비용이 크고 상용화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에 대해 정부가 “앞으로 10~15년 동안 발생할 탄소감축 크레디트를 1톤당 얼마에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구조다.
실제로 성장 기금은 첫 번째 계약으로 CCS 기술 기업 엔트로피(Entropy)와 15년간 매년 18만5000톤의 감축실적을 톤당 86.50캐나다달러에 매입하기로 약정하며 이러한 구조를 실행에 옮겼다. 탄소가격이 떨어지면 정부가 차액을 메워주고, 반대로 탄소가격이 크게 상승하면 기업이 일부를 정부에 돌려주는 방식으로 위험을 나눈다. 기업 입장에서는 최소 수익이 보장되니 대규모 설비 투자에 나설 수 있고, 정부는 그 대가로 고품질 감축 실적을 안정적으로 확보한다.
민간 주도형 실험으로는 넥스트젠 탄소제거(CDR) 이니셔티브를 들 수 있다. 사우스폴과 미츠비시가 주도해 출범한 이 연합에는 BCG, 미쯔이 O.S.K. 라인스, 스위스 리(Swiss Re), UBS 등 다양한 글로벌 기업이 참여하고 있으며, 2025년까지 100만 톤의 CO₂를 제거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일정 규모의 고품질 탄소제거(CDR) 크레디트를 장기 구매하겠다고 약속하고, 이 구매 의향을 바탕으로 DAC, 바이오차 등 기후테크 기업과 장기 오프테이크 계약을 맺는다.
넥스트젠은 이러한 방식으로 현재까지 약 19만 톤의 CO₂ 제거 크레디트를 선구매한 상태다. 총구매 금액 일부를 선지급함으로써 초기 현금흐름을 만들어주는 점이 EPC와 매우 닮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장차 규제가 강화될 미래를 대비해 고품질 크레디트를 미리 확보하는 전략이고, 기후테크 기업 입장에서는 크레디트의 수요와 가격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에서 투자를 확대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싱가포르통화청(MAS)이 주도한 트랙션은 아시아의 석탄발전을 조기 폐쇄하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전환 크레디트 실험이다. 필리핀 루손섬의 한 석탄발전소를 당초 계획(2040년)보다 10년 이른 2030년에 조기 폐쇄하고, 그 부지에 태양광발전을 설치하는 프로젝트가 첫 번째 파일럿이다. 이를 통해 최대 1900만 톤의 CO₂ 배출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특수목적법인(SPV)이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발전사에는 조기 폐쇄로 인한 손실을 보전하고, 동시에 재생에너지 설비투자비를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원래 계획대로면 배출되었을 CO₂’와 ‘조기 폐쇄로 피한 CO₂’의 차이가 전환 크레디트로 측정되고, 싱가포르와 필리핀 정부, 민간기업이 미리 약정한 가격으로 이를 매입한다. 발전사에는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 문 닫는 것이 ‘순수 손실’이 아니라 새로운 선택지가 되고, 금융기관은 전환금융 실적을 쌓을 수 있으며, 정부는 석탄감축 시계를 앞당길 수 있다. MAS는 이러한 전환 크레디트를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할 경우 연간 최대 10억 톤의 온실가스 감축이 가능할 것으로 추산한다.
이 3가지 사례를 비교해보면 캐나다 성장 기금은 정부 주도로, 넥스트젠은 민간 주도로, 트랙션은 민관 파트너십으로 설계된 점이 다르다. 그러나 ‘미래 감축 실적을 미리 계약하고, 그 기대치를 기반으로 오늘의 자금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모두 EPC가 지향하는 방향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한국에서 EPC를 시험해볼 수 있는 지점
한국에서 EPC를 적용할 수 있는 분야는 전통적 산업 구분보다 전환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감축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에 따라 인프라 전환, 운송 체계 전환, 산업·기술혁신 전환이라는 3가지 축으로 정리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구조는 에너지·수송·산업 기술을 각각 독립된 ‘전환 시스템’으로 바라보게 하며, 정책·금융·민간 역할을 병렬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첫째, 인프라 전환(Infrastructure Transition) 분야에서는 석탄발전 조기 폐쇄가 대표 사례다. 한국에서도 노후 석탄화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감축하고 재생에너지 생산을 확대하는 방향성이 명확하지만, 발전사 입장에서는 예정된 운영 기간보다 일찍 문 닫는 순간 미회수 투자비와 부채 상환 부담이 동시에 몰리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한다. EPC는 이러한 조기 폐쇄의 재무적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제공한다. 조기 폐쇄로 인해 피하게 되는 탄소배출량을 기준으로 전환 크레디트를 설계하고, 정부· 정책금융·민간 금융이 이 크레디트를 장기적으로 매입하겠다는 약속을 제공함으로써 발전사의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 이 방식으로 발행된 EPC는 정부의 NDC 달성, 공기업의 넷제로 전략, 국내 ETS와 국제 VCM 연계 등 다양한 경로로 활용될 수 있으며, 인프라 수준의 전환을 촉진하는 핵심 금융 메커니즘이 된다.
둘째, 운송 체계 전환(Transport & Mobility Transition) 분야는 EPC를 실제 적용하기에 가장 실증성이 높은 영역이다. 이미 국내에서는 CNG 버스를 전기버스로 전환하고, 이를 외부 사업으로 인증해 탄소크레디트를 발행한 사례가 있다. 이 구조를 확장하면, 예를 들어 ‘전기버스 100대 전환 시 향후 10년간 기대되는 총감축량’을 기준으로 EPC를 발행할 수 있다. 금융기관은 이 EPC를 담보로 선대출을 실행하고, 지자체나 대규모 탄소배출 기업이 EPC를 장기 구매하는 방식으로 수요를 보장한다. 실제 전환이 실행되면 검증된 감축량을 기준으로 크레디트가 정산된다. 이러한 구조는 “초기 비용 부담 때문에 전기버스 전환이 어렵다”는 운수업계의 고질적 문제를 ‘미래 감축 실적을 기반으로 한 현금흐름 구조’로 재설계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EPC는 개별 차량의 연료 전환 효과뿐 아니라 도시 대기질 개선과 운송 부문 전체의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결과를 가격에 반영하는 도구가 된다.
셋째, 산업·기술혁신 전환(Industrial & Tech Innovation Transition) 분야에서는 수소환원제철, 탄소포집 및 활용·저장(CCUS), 저탄소 공정 기술 같은 미래산업 기반의 감축 프로젝트가 주요 대상이다. 산업기술 기반 전환은 대규모 투자와 높은 기술 리스크가 수반되고, 회수 기간도 길기 때문에 ETS 가격만으로는 민간투자가 충분히 유입되기 어렵다. EPC를 적용하면 정부와 정책금융이 최소 탄소가격 또는 크레디트 수요를 보장해 민간이 감당해야 할 기술·자본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특히 한국이 강점을 지닌 반도체·배터리·소재 분야 내 저전력·저탄소 공정 전환을 EPC와 결합하면 기술 경쟁력과 탄소 경쟁력을 동시에 강화하는 ‘더블 성장’ 전략을 실현 가능하다. 산업 전환 속도를 높이기 위해 필수 금융적 신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EPC는 이 분야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구가 된다.
제도 설계의 난점과 넘어야 할 질문들
EPC가 실제 제도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난관을 넘어야 한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질문은 ‘미래 감축량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게 예측할 수 있는가’다. EPC의 생명은 결국 환경적 무결성이다. 감축량을 측정하고 보고하고 검증하는 체계가 허술하면 아무리 세련된 금융 구조를 얹어도 시장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예를 들어 감축량을 과대 추정해 너무 많은 EPC를 발행하면 이후 실적이 따라오지 않았을 때 재정 낭비와 그린워싱 논란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를 방지하려면 산업·기술별로 보수적 추가성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사용된 가정과 모델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독립된 검증기관의 사전 검토를 거치는 절차도 필요하다. 국제표준(베라, 골드 스탠더드 등)을 참고하되, 한국의 NDC 회계와 EU·국제 기준 사이에서 이중 계산을 막는 국내 등록부와 대응 조정 절차를 설계해야 한다.
둘째는 계약 구조와 선자금 조달 문제다. 누가 어느 시점에 어떤 조건으로 EPC를 매입·보장할 것인지, 누구의 돈으로 선지급할 것인지, 손실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설계를 피해갈 수 없다. 정부기금, 정책금융, 민간투자자가 모두 참여하는 다층 구조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공공재원과 민간 수익 사이의 형평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캐나다 성장 기금처럼 정부가 탄소가격 리스크를 일부 떠안는 방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
셋째는 리스크 헤지와 책임 배분 문제다. 기술 실패, 정책 변경, 탄소가격 변동 등 다양한 리스크가 얽힌 상황에서 EPC를 설계하려면 페널티와 환수 조항, 정부·보험사의 보증, 파생상품과 헤지 전략 등을 어떻게 조합할지 고민해야 한다. 모든 리스크를 정부가 떠안는 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민간이 감당해야 할 위험과 공공이 함께 나눌 위험의 경계를 명확히 그으면서도 시장 참여가 가능할 정도의 매력도를 유지하는 미세한 조정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거버넌스와 사회적 수용성도 큰 과제다. EPC는 기후 정책, 재정 정책, 금융 정책, 산업 정책이 교차하는 영역이기에 어느 한 부처가 단독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관련 부처 간 역할 분담, 민간기업과 금융,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논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특히 ‘새로운 인센티브 제도’는 언제나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아니냐’는 의심을 동반할 수 있기에 EPC 설계 과정에서 공익성과 투명성을 충분히 설명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필수다.
EPC가 가져올 이해관계자별 기대 효과
기업 입장에서 현재 탄소감축은 대체로 규제와 평판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선제 투자비는 비용으로 처리되고, 환경성과는 기업가치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EPC가 도입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미래 감축 ‘성과·진전’이 크레디트와 자산으로 미리 인정되면서 기후테크와 전환투자가 새로운 수익과 기업가치 요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정부 입장에서 현재 기후 정책의 주요 수단은 규제와 보조금이다. 이는 필요하지만 재정 부담이 큰 데다 민간투자를 충분히 레버리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EPC는 정부가 인센티브 설계자이자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NDC 달성 시계를 앞당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부의 탄소감축 관련 예산은 성과에 연동되어 보다 효율적으로 집행된다.
투자자와 금융기관 입장에서 EPC는 새로운 기후금융 상품의 탄생을 의미한다. 현재 ESG 투자 수요는 크지만 구조가 선명한 기후투자 상품은 아직 부족하다. 특히 기후테크는 기술 리스크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다. EPC를 활용한 성과 연계 채권, EPC 기반 펀드, EPC 오프테이크 계약 등은 투자자가 미래 감축 실적에 기반해 보다 안정적 수익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동시에 포트폴리오 다변화와 기후 리스크 헤지 수단도 함께 늘어난다.
시민사회와 국민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기후 정책은 종종 목표와 현실의 간극을 보여준다. 탄소중립을 향한 구호는 분명한데, 실제 감축 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규제 중심 정책에 대한 피로감과 불신도 존재한다. EPC는 환경성과와 경제성의 동시 개선을 체감할 수 있게 만들고 탄소감축 약속이나 계획에 대한 신뢰도를 향상시킬 것이다.
탄소 전략의 빈칸 메우기
우리는 이미 탄소 전략의 많은 칸을 채워왔다. ETS, 탄소세 논의, 재생에너지 확대, 각종 의무감축제도는 그간의 성과다. 그러나 여전히 빈칸이 남아 있다. 그 빈칸은 ‘규제가 본격화되기 전, 또는 규제가 미처 닿지 못한 영역에서 먼저 움직이는 기업과 기후테크를 어떻게 지원하고, 그 행동을 자산가치와 시장기회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자리다. EPC는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답안지다.
이제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전기버스, 석탄 조기 폐쇄, CCUS, 수소환원제철 등에서의 작지만 잘 설계된 첫 실증 사례다. 규제에서 동기부여로, 이중 압력에서 더블 성장으로 나아가려면 탄소중립 시계를 앞당기는 미리 인센티브, EPC를 한국적 맥락에 맞게 설계하고 실행에 옮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명은·허승준·고민정·이택준 사회적가치연구원 연구원
사회적가치연구원
SK그룹이 2018년에 설립한 비영리재단법인. 기업의 사회(환경)적 가치 활동이 기업의 자산가치로 인정받는 시장 메커니즘을 구상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이를 위해 사회·환경문제 해결 성과의 화폐적 측정방법론 개발, 보상 실험, 회계 연구, 정부 정책 및 거래 제도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