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그림은 눈으로 감상하지만, 어떤 그림은 귀로도 들린다. 눈앞의 도상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관람객을 작품에 더 몰입시킨다.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김훈규 작가가 그려낸 동물들은 끊임없이 말을 건다.
서울 강남구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는 김훈규 작가의 개인전 ‘The Prayers’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동물들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자리다. 그는 오랜 시간 작품에 동물 군상을 등장시켜왔다. 이번에 선보이는 컬러 페인팅 시리즈는 작품마다 두 가지의 도미네이트 컬러(Dominate color, 지배색)를 설정한 후 다양한 동물을 활용해 이미지를 표현했다. 가령 초록색과 붉은색을 지배색으로 결정했다면, 머릿속에 이 두 가지 색을 입력한 후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쥐, 돼지, 거북이, 토끼, 여우, 닭, 오리, 용 등의 동물들을 배치해 작업하는 식이다.
그들은 길게는 가로 2m 넘게 펼쳐진 화면 이곳저곳에서 등장한다. 화려한 색의 동물 군상이 빼곡한 작품은 고려불화를 연상시킨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지브리 스튜디오 영화의 한 장면같기도,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각 동물들은 어떤 작품에서는 특정 종교를 대변한다. 붉은 가재는 기독교를, 용과 뱀은 불교, 남방가재는 천주교, 개구리는 한국 민속 신앙을 은유하는 식이다. 하지만 모든 동물들이 종교적 색채를 지닌 것은 아니다. 그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태극기와 신라면 박스, 병풍 앞 제사상을 두고 절하는 동물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배달원 등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평범한 모습의 동물 형상이 함께 혼재돼 복잡다단한 세상을 나타낸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각 동물의 상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옷을 입은 동물, 벗은 동물, 털이 없는 동물, 가죽이 벗겨진 동물, 목이 잘린 동물 등 인간 사회처럼 다양한 동물들을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컬러 페인팅 시리즈는 강렬한 색감과 지배색 간의 대비가 특징이다. 동물뿐 아니라 색에도 종교적 도상이 들어 있다.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와 천주교는 붉은색과 파란색, 이슬람교는 녹색, 러버덕교는 노란색으로 대표된다. 그런가 하면 루브르 박물관을 배경으로 유럽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가벼운 주제를 말하는 작품도 있다.
“이번 시리즈는 ‘색은 곧 인연이다’라는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됐어요. 빛이 어떤 물질에 부딪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들어와 색을 인식하는 것이 세계에 의지를 실현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팔레트처럼 부딪히고 투쟁하는 과정을 조화롭게 한 화면에 담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작가의 캔버스는 비단이다. 고려 불화에 사용하는 채색 기법인 석채(石彩) 위주로 비단을 염색시켜가며 작업한 뒤, 위에 식물성 안료를 덧발라 완성한다. 원단을 물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실수한다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무척 부담스럽고 예민한 과정이지만 작가의 작업 속도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의 수만 해도 20여 점. 이 모든 작품을 완성하는데 1년 반이 걸렸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작품 당 5~7주가 소요된다. 그 안에 세세하게 그려 넣은 동물과 요소들을 생각하면 매우 빠른 시간이다. “어렸을 때 제 별명이 공무원이었어요. 무슨 일이던 철저하게 시간 계산을 해서 정확하게 완수하곤 했거든요. 마치 기계가 인쇄하듯이 맨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림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작업합니다. 이쯤 경력이 되니 다행히 실수도 잘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이번 시리즈는 작가 스스로가 본인을 끊임없이 담금질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기존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업 환경에 자신을 내던져 실험한 것. 부유하던 이미지나 키워드 등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즉흥적으로 작업하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논리적인 생각과 구조를 먼저 정한 뒤 작업하는 것으로 작업 방식에 변화를 줬다.
“10년 넘게 작업해 오다 보니 항상 이전 작업보다는 더 나은 것을 내놓아야겠다고 생각해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와 투쟁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작업 방식에 변화를 줘 봐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작가는 좋은 작품이란 시대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전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성이 상실되고 분열돼 가고 있어요. 세대 간, 정치 세력 간 갈등도 심화하고 있고요. 이 과정에서 정치가 마치 종교화돼 간다고 생각해요. 특정 정당을 지지하면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처럼요. 그러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세속적인 것으로 회귀하고요. 이렇게 양극단의 것들을 하나의 화면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시는 12월 20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