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11월 13일 오후 5시 13분
경영권을 사고파는 사모펀드(PEF)가 국내에 20년 전 도입된 것은 국부 유출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외환위기 이후 주요 은행과 알짜 기업이 해외 PEF에 줄줄이 팔려나가는 것을 모두가 지켜만 봤다. 미국 PEF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인수 논란은 여론에 불을 지폈다.
토종 PEF는 ‘해외 약탈 자본’에 맞설 대항마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속에 출범했다. 지난 20년 동안 토종 PEF는 급성장하면서 한국 자본시장에서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올해 역설적인 상황에 빠졌다. MBK파트너스가 인수한 홈플러스가 지난 3월 갑작스럽게 기업회생을 신청하면서 분위기가 돌변했다. MBK의 홈플러스 경영 실패 책임은 PEF업계 전체로 번져갔다. PEF는 단기 수익 추구에만 치중하는 ‘먹튀 자본’이라는 인식이 재차 퍼져갔다. 한 PEF 운용사 대표는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산업의 한 축을 떠받쳐 온 PEF의 순기능은 무시당한 채 돌고 돌아 다시 론스타 취급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론스타 취급 받는 토종 PEF13일 한국경제신문 마켓인사이트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올해 PEF가 인수자로 참여한 5000억원 이상 중대형 바이아웃(경영권 거래) 딜 8건 중 6건은 해외 PEF 차지였다. 어피니티의 롯데렌탈 인수(1조7848억원),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SK에코플랜트 환경자회사 인수(1조7800억원), EQT의 더존비즈온 인수(1조3158억원) 등이 조 단위 딜로 이름을 올렸다.
미드캡(중형)으로 눈높이를 낮춰도 KKR의 화장품 용기업체 삼화 인수(7330억원), 블랙스톤의 준오헤어 인수(5600억원), EQT의 명함 앱 리멤버앤컴퍼니 인수(5000억원) 등 해외 PEF가 주도한 거래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해외 PEF가 시장을 휩쓰는 동안 토종 PEF는 존재감이 크게 떨어졌다. 글랜우드프라이빗에쿼티(PE)의 LG화학 수처리사업부 인수(1조4000억원), VIG파트너스의 비올 인수(약 7000억원)가 그나마 눈에 띄는 중대형 딜이었다.
글로벌 PEF의 국내 인수합병(M&A) 시장 독식 현상은 최근 2~3년 추세와 정반대다. 2023~2024년 대형 M&A 거래에서 국내 PEF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달했으나 올해는 24.2%로 급감했다. 반대로 해외 PEF 비중은 30% 안팎에서 75.8%로 가파르게 증가했다.◇글로벌 PEF와 역차별 심화홈플러스 사태가 직격탄이 됐다. 정치권이 PEF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을 잇달아 발의하고 국회 상임위원회 호출과 망신 주기식 호통을 일삼자 토종 PEF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국내 PEF 관계자는 “정치권, 노동조합, 지역사회 등지에서 조금이라도 잡음이 나오면 어디로 불똥이 튈지 몰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해외 PEF는 정치권과 여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 사회적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유럽계 EQT의 더존비즈온 인수는 이 같은 온도 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소수주주 친화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앤컴퍼니, VIG파트너스 등 국내 PEF는 상장사를 인수할 때 최대주주 지분 매수단가와 동일한 가격으로 잔여 지분 전량에 대한 공개매수를 진행했다. 의무공개매수 도입 전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과 달리 EQT는 최대주주 지분에만 프리미엄을 얹어주며 경영권을 손에 쥐었다.
토종 PEF는 국회에 발의된 규제 강화 법안이 시행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법안이 현실화하면 국내 PEF만 역차별을 받을 것이란 우려도 상당하다. PEF에 대한 행위 규제는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가능한데 이는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PEF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한 토종 PEF 파트너는 “강달러 현상이 고착화하며 글로벌 PEF 입장에선 원화로 거래되는 국내 M&A 시장 매물들 가격이 크게 떨어졌는데 국내 PEF만 규제를 받는다면 경쟁력에서 밀리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송은경/최다은 기자 nor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