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1500원 임박, 원화가 녹아 내린다

입력 2025-11-14 06:00
수정 2025-11-14 07:15



장면1.
약달러 기조에 올여름 항공·여행주에 투자한 이 과장(40)은 요즘 속이 쓰리다. 코스피가 치솟는데 자신이 들고 있는 주식은 최근의 고환율로 줄줄이 하락세다. 그가 산 제주항공과 진에어 주가는 석 달 새 20% 넘게 떨어졌고 노랑풍선·하나투어 등 여행주도 일제히 내리막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미친 환율에 해외여행 포기한다’는 글이 줄을 잇는다.

장면2.
“같은 지수를 추종하는 상품지수펀드(ETF)인데 수익이 이렇게 다를 줄 몰랐어요.” 회사원 김 대리(35)는 한 달 전 미국 S&P500 ETF 중 환노출형과 환헤지형 상품을 샀다. 원·달러 환율이 1460원을 넘어선 최근 환노출형은 3% 정도 올랐지만 환헤지형은 1.5% 수준에 그쳤다. 환노출형 ETF는 원·달러 환율 변동이 그대로 수익률에 반영되는 구조다. 환율이 상승(원화 약세)할 때 환차익을 누릴 수 있다. 반면 상품명에 ‘H’가 붙은 환헤지형 ETF는 환율 변동 영향을 차단하도록 설계했고 헤지(위험 회피) 비용이 든다.

장면3.
미국 뉴욕주에 대학생 딸을 유학 보내고 있는 박모(52) 씨는 요즘 송금할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 1년 전보다 환율이 10% 가까이 뛰면서 매달 보내는 학비와 생활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원 생활 중인 장모(28) 씨 역시 “환율이 상승하고 현지 물가도 올라 유학이 고통스럽다. 외식할 때 내는 팁 부담도 배로 늘어 엄두도 못 낸다”며 “목돈을 미리 달러로 바꿔둘 걸 후회된다”고 말했다.

고환율이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어느덧 1470원을 바라보고 있다. 11원 12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일 오후 3시 30분 주간종가 대비 3.90원 오른 1465.70원에 마감했다.
◆과거와 다른 환율 상승
과거에도 위기 때마다 원·달러 환율은 급등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원화는 800원대에서 1900원대까지 폭락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930원대에서 1570원대까지 떨어졌다. 당시 코스피는 50% 이상 급락했고 경상수지는 경제 위축으로 인한 불황형 흑자(수출보다 수입 감소분이 큰 상황)를 기록했다.

하지만 지금의 고환율은 양상이 다르다. 올해 코스피 지수는 그야말로 불장이다. 이재명 정부 출범일인 6월 4일 코스피는 2770.84였다. 불과 보름 만에 3000선을 회복했고 10월 27일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한데 이어 일주일 만에 4200선을 찍었다.

코스피의 랠리는 외국인 투자자가 이끌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코스피 불장이 본격화한 6월 초에서 9월 말 사이 외국인 투자자의 순매수 규모는 두 배로 불어났다. 10월 24일 기준 코스피 시가총액 3243조원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 보유액은 1124조원에 달해 34.7%를 차지했다(한국거래소 정보데이터시스템). 글로벌 유동성에 반도체 업황 개선, 시장 친화적인 정부 정책에 대한 기대감 등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통상 코스피가 오르면 외국인 자금이 유입되면서 원화에 대한 수요가 커지는데 최근엔 ‘코스피 상승=원화 강세’ 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경상흑자=원화 강세’ 공식도 통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경상수지 흑자는 외화 유입을 늘려 환율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상수지는 29개월째 흑자를 이어가고 있다(한국은행). 2000년대 들어 두 번째 최장 기간 흑자를 나타낸 기록이다. 지난 9월에는 134억70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했다. 월간 기준 역대 2위이자 9월 기준 최대 수치다.


◆원화값 하락의 원인이 많다
돈의 흐름을 들여다보면 예전과는 결이 다르다. 직접투자와 증권투자 등 금융계정에서 적자가 누적되면서 겉으로 드러난 흑자 뒤편에는 ‘달러 유출’이 자리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경상수지는 827억7000만달러 흑자를 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직접투자(206억 달러)와 증권투자(603억9000만 달러) 부문에서 810억 달러에 가까운 적자가 발생했다. 경상흑자로 벌어들인 달러가 금융계정을 통해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간 것이다.

개인과 연기금이 앞다퉈 해외 주식·채권에 투자하고 기업들까지 생산기지와 자회사 확장에 나서면서 국내로 들어온 달러가 다시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10월 중 개인투자자들은 해외주식을 68억1000만 달러 순매수했다. 이는 2011년 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대 규모다. 직전 달인 9월(27억7000만 달러) 대비 2.5배 가까이 증가했다. AI·빅테크, 양자컴퓨터 주식 매수를 확대한 것으로 분석된다.

올해 6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총 적립금은 1269조1355억원에 달한다. 이 중 주식 투자액은 635조5734억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절반을 넘었다. 국내 주식은 189조원(14.9%), 해외 주식은 446조원(35.2%)으로 해외 투자가 국내 투자의 두 배를 웃돈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당장 환전하지 않는 점도 원화 약세(환율 상승)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여기에 정치·외교적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달러 선호가 강화되는 상황이다. 변정규 다이와증권 FICC 본부장은 “트럼프 행정부와의 3500억 달러 규모 관세 협상 이후 자금 유출 우려가 여전히 존재하고 미국이 앞으로 어떤 카드를 꺼낼지 예측하기 어렵다”며 “이런 불안감으로 기업과 개인 모두 필요할 수 있는 달러를 미리 확보하거나 유보하려는 인식이 강해 원화 강세가 쉽지 않은 구조”라고 분석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약 4200억 달러로 단순 규모만 보면 세계 10위 수준이지만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23%로 주요국에 비해 낮은 편”이라며 “수출 비중이 높은 나라에서 외환보유액이 충분치 않다 보니 대외 충격이 발생하면 환율이 쉽게 오를 수 있는 구조인 데다 한·미, 한·일 통화스와프가 체결돼 있지 않아 외환시장 안정 장치가 사실상 없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환율 전망 1500원
김 교수는 연말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는 “경제 체질이 달라지지 않는 한 외환시장의 불안이 위기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변 본부장은 2026년 상반기 원·달러 환율이 1400~1500원 사이에서 움직이고 하반기에는 환율이 1350~1450원 사이에서 오르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는 “2026년 상반기는 양국 금리 격차가 해소돼도 미국 경제 악화로 인해 달러 선호가 강해질 것으로 보이고 하반기에는 10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정책 지속 여부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며 “스태그플레이션(경기둔화 속 물가상승) 상황에서 물가 문제가 부상하면 친트럼프 인사라도 새 미국 중앙은행 의장이 금리인하를 적극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말에는 환율이 1300원대 진입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며 “급한 수요가 아니라면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또 “달러를 당장 사야 하는 실수요자들은 오는 12월 11일 예정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리인하가 예상되지만 확실치 않기 때문에 금리인하 기대감보다 불발 시 환율 상승 위험이 더 크다”면서 “FOMC 직전과 직후 주는 피하고 미리 환전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환율이 1400원대 근처에서 움직일 때 달러 매수를 추천했다.

김 교수는 고환율 환경에서는 매달 일정 금액을 미국 우량주에 투자하는 전략을 권했다. 월급의 약 25%를 꾸준히 배분하고 개별 종목이 부담스럽다면 S&P500이나 나스닥 지수를 추종하는 ETF에 투자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원화 경쟁력 높이려면
1400원대 환율은 시장참여자들 사이에 일종의 ‘경고등’처럼 받아들여진다. 과거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의 국가 부도 공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 원·달러 환율 급등(원화값 하락)은 산업 생산비용 증가로 이어져 경기침체를 유발할 수 있다. 박용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에 의뢰한 ‘원·달러 환율 상승에 따른 산업별 생산비 영향’ 분석 결과에 따르면 환율이 1500원으로 2023년 평균환율 1305.9원 대비 14.9% 상승하면 전체 산업 생산비용은 4.4% 증가할 것으로 관측됐다.

원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금융시장 규제완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 교수는 “예컨대 삼성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사업에 진출할 수만 있어도 원화 위상이 달라질 수 있다”며 “해외 사례를 보면 애플은 금융서비스에 진출해 개인당 약 25만 달러 예금 계좌를 제공하고 연 4%대 금리를 지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 본부장은 한국은행의 통화 완화 정책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전통적으로 기업의 자금 조달을 돕기 위해 기준금리를 낮게 유지해왔지만 이제는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도 많아졌고 투자 유입이 국가 경제의 핵심 축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도 마이너스 금리로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간 전례가 있다”며 “지금처럼 한국 금리가 미국보다 낮으면 외국인 입장에선 원화 자산이 매력적이지 않다. 금리를 적정 수준으로 높여야 외국 자금이 다시 들어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 여의도는 초긴장 상태다. 환율이 급등했고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면 한국 증시가 풀썩 주저앉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