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만에 대참사…잘 나가던 'AI 회사', 무슨 일이 터졌길래 [글로벌 머니 X파일]

입력 2025-11-13 07:00
수정 2025-11-13 10:24


최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인공지능(AI) 투자 열풍 속에 '옥석 가리기'가 시작됐다. AI 기술 자체의 가능성을 넘어, 실제 사업 모델의 수익성을 냉정하게 검증하는 현실화 단계로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법률 AI(리걸테크) 분야에서 이런 변화가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영국 'AI 스타트업 아이콘'의 몰락13일 영국의 법률 뉴스 전문 플랫폼 '로이어닷컴'에 따르면 영국 리걸테크의 '아이콘' '로빈 AI'가 지난 12일 심각한 자금난으로 '긴급 인수' 협상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로빈 AI는 소프트뱅크와 테마섹 등 글로벌 거대 투자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한 글로벌 대표적인 AI 스타트업이다.

앞서 로빈 AI는 지난 1월 '선데이 타임스 100대 테크 리스트'에서 소프트웨어 부문 10위를 차지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지난 3년간 매출 증가율 227.39%를 기록했다.

로빈 AI의 경영 상태는 불과 3주 만에 급속히 악화했다. 지난달 말 5000만 달러 규모의 신규 펀딩 유치가 무산되면서 회사는 전체 인력의 3분의 1을 감축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회사는 ‘인솔번시 마켓플레이스’에 매물로 등록돼 긴급히 구조 투자자를 찾기 시작했다.

이달 초 결정적인 타격을 맞았다. 영국 국세청은 미납 세금과 기타 채무를 이유로 법원에 ‘청산 청원’을 제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는 회사가 세금조차 납부할 현금이 부족할 정도로 유동성이 고갈됐음을 보여준다. 최종 인수 제안 마감일은 13일로 정해졌다. 현재 회사의 재무 상태는 매출 약 800만 파운드, 손실 1200만 파운드 수준으로 전해진다.

이번 일은 단순한 자금난이 아니라는 평가다. 투자자들이 영국 세무청의 청산 절차를 막을 최소한의 긴급 자금조차 투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자금이 ‘없어서’가 아니라 ‘투자 의지가 없어서’ 발생한 일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로빈 AI의 사업 모델 자체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이다. 투자자들은 회생 가능성을 본 게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으로 투자금을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리걸테크 시장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캐나다의 클리오는 지난 10일 5억 달러 규모의 시리즈 G 투자 유치에 성공해 기업가치 5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스웨덴의 레고라 역시 1억 5000만 달러를 조달했다. 자금은 여전히 이 시장에 흐르고 있지만, 시장은 냉혹하게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로빈 AI의 추락은 단일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AI 산업 전반에 걸친 밸류에이션 재평가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거품이 걷히는 전환기의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AI 기업이 아닌 AI 기업?로빈 AI의 몰락은 단순한 경영 실패가 아니다. 법률 기술 전문가 켄 크러치필드는 법률 기술 플랫폼 'LawSites'에 "벤처캐피탈(VC)들은 로빈 AI를 AI 소프트웨어(SaaS) 기업으로 믿고 투자했지만, 실제로는 AI를 도구로 활용하는 계약 검토 서비스(BPO) 기업이었다"고 지적했다.

실제 Robin AI의 구조는 구독 기반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보다는 인력 중심의 특정 분야 아웃소싱 전문 기업(BPO)에 가깝다. 이른바 ‘Lawyer-in-the-Loop’ 모델을 채택해 AI가 작성한 결과물을 반드시 인간 변호사가 검토했다. 완전 자동화가 아니라, 사람이 개입하는 서비스였다. 회사는 40명 이상의 법률 전문가를 직접 고용해 AI 훈련과 검증에 투입했다. 이는 전형적인 소프트웨어 기업이 아닌, 컨설팅 기반의 인건비 구조였다.

'Lawyer-in-the-loop' 모델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법률 서비스의 한계 때문이다. AI 기술은 아직 법률 분야에서 요구되는 완벽한 정확성과 신뢰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지난해 스탠퍼드 HAI(인간중심 AI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최신 법률 AI 모델조차 17% 이상의 검색에서 '환각' 현상이 나타났다. 법률 분야에서 17%의 오류율로는 현업에 투입할 수 없다.

규제 당국 역시 이를 인지했다. 미국 변호사 협회(ABA)는 지난해 7월 '공식 의견 512호'를 발표했다. AI 사용 시 변호사의 '감독 의무'와 '최종 책임'을 명확히 했다. AI는 '변호사 보조원'으로 간주했다. 변호사는 AI의 결과물을 독립적으로 검증해야 할 책임을 진다.

결국 로빈 AI는 신뢰성 높은 'AI 제품'을 팔 수 없었다. '인간이 검증하는 서비스(BPO)'를 팔아야 했다. 2023~2024년 이 기업에 투자한 VC들은 해당 '인건비'를 AI 모델 훈련을 위한 일시적 비용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올 하반기 시장이 냉각되자, 이 비용이 사실은 '영구적 COGS(매출원가)'였음이 드러났다. AI가 모든 분야를 아직 대체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줬다.



로빈 AI의 실패는 전체 리걸테크의 실패로 해석할 수는 없다. '시장 내 옥석 가리기'의 신호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영국만 해도 올해 상반기에만 이 분야의 투자액은 1억1600만~1억1700만 파운드였다. 지난해 연간 투자 규모를 거의 따라잡았다. 투자 유치에 성공한 기업의 공통점은 ‘변호사를 대체하지 않고, 변호사 업무를 돕는’ 코파일럿 전략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클리오는 리서치·계약 관리(CLM)·AI 기능을 하나로 묶은 통합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하비는 로펌이 직접 AI를 통제하고 법적 책임을 지는 구조로 업계의 신뢰를 확보했다. 진짜 돈 버는 AI에 주목로빈 AI의 몰락은 'AI 현실화'의 신호탄이라는 분석이다. 'AI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과대광고가 끝나고, 'AI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를 구분하는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의 하이프 사이클에 따르면, 지난해 생성형 AI는 '과대광고의 정점'을 통과했다.

이는 AI 투자의 양극화를 심화할 전망이다. 지난달 유럽 테크 생태계는 83억 유로를 조달하는 등 성과를 보였지만 소수 거대 AI·딥테크 기업에 투자가 몰렸다. 내년부터는 AI 스타트업의 '진짜' 수익성(EBITDA)과 사업 모델을 혹독하게 검증하는 시기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에릭 브린욜프슨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 교수는 "AI의 초기 비즈니스 수익이 실망스러운 이유는 기업들이 AI를 도입하면서 기존 업무 프로세스를 바꾸지 않기 때문"이라며 "진정한 생산성 향상은 기술 도입이 아닌 '조직 재설계'에서 온다"고 분석했다. 로빈 AI처럼 기존의 인력 기반 서비스 모델에 AI를 덧붙이는 방식으로는 생산성 향상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 리걸테크 시장에선 '규제 리스크'가 컸다. 리걸테크 기업과 직역 단체인 대한변호사협회 간 충돌이 이어졌다. 작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변협에 부과한 10억원의 과징금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변호사 직무는 고도의 공공성과 윤리성이 있다"며 "변호사 광고의 범위를 정함에 있어 변협에 상당한 재량이 부여돼 있다"고 판시했다.

법무부는 로톡 이용 변호사 징계 처분을 모두 취소하고, 지난 5월 변호사 검색 서비스 운영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런 조치로 업계의 불확실성이 줄었다는 분석이다.

규제 불확실성은 한국 리걸테크 기업들이 로빈AI의 함정(BPO 모델)을 피하도록 유도했다. 일종의 '규제의 역설'이다. 국내 리걸테크 기업은 '플랫폼'이 아닌 '변호사 보조 AI 솔루션' 개발에 집중하며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로앤컴퍼니(슈퍼로이어), 엘박스(엘박스 AI)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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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