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파마 '살' 찌운다…제약 중심축 '항암'서 '비만'으로 급선회

입력 2025-11-12 17:48
수정 2025-11-12 23:50
2022년 11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SNS에 ‘30파운드(약 14㎏)를 뺐다!’는 글을 남겼다. 어떻게 체중을 줄였냐는 한 팔로어의 질문에 그는 이같이 답했다. ‘금식과 위고비.’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호 중 한 명이 다이어트를 위해 비만약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 등 유명 인사들이 비만약으로 살을 뺐다고 공공연하게 밝히며 비만약은 단순한 약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인 ‘비만 혁명’의 물결은 일라이릴리의 비만약 ‘마운자로’ 매출이 MSD의 면역 항암제 ‘키트루다’ 매출을 제치며 정점을 찍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혁신적 항암 치료의 대명사이자 오랜 기간 난공불락의 매출 1위로 군림해 온 키트루다가 이렇게 빨리 2위로 밀려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장에서는 글로벌 제약산업의 중심축이 항암에서 비만으로 이동하는 신호탄이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마운자로, 키트루다의 아성 무너뜨려
마운자로는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GLP)-1과 위억제펩타이드(GIP)에 동시 작용하는 이중작용제다. 당초 비만약이 아니라 제2형 당뇨병 치료제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 2022년 5월 처음 출시됐다. 하지만 이 약의 주성분 ‘티르제파타이드’의 체중 감량 효과가 크다는 게 알려지자 당뇨병 치료제보다는 ‘살 빼는 약’으로 입소문이 퍼졌다. 일라이릴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듬해 미국에서 동일한 성분 약을 ‘젭바운드’라는 이름의 비만약으로 출시했다.

큰 체중 감량 효과에 마운자로 매출은 올해 초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미국 등 주요 시장에서 비만약 시장을 선점한 노보노디스크 위고비를 따라잡았다. ‘같은 성분, 다른 이름’의 마운자로와 젭바운드의 매출 합계는 지난 2분기 86억달러(약 12조5000억원)로 키트루다(80억달러)를 근소하게 앞선 데 이어 3분기 101억달러로 키트루다(81억달러)와의 차이를 20억달러로 벌렸다. 4분기를 포함한 올해 전체 매출에서 마운자로가 키트루다를 뛰어넘는 건 확실시된다.

글로벌 의약품 매출 1위 왕좌 교체는 당초 예상을 크게 앞질렀다. 지난 3년간 독보적인 ‘매출 황제’로 군림한 키트루다는 50% 이상의 점유율로 글로벌 면역 항암제 시장 절대 강자다. 마운자로는 노보노디스크 위고비와 비만약 시장을 양분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전체 의약품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글로벌 비만 시장 폭발적 성장
비만약 시장의 성장세는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163억달러(약 23조6000억원)이던 글로벌 비만약 시장이 올해 두 배에 가까운 300억달러, 2030년엔 1000억달러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제약업계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폭발적인 성장 곡선이다.

가장 큰 배경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가파르게 오르는 비만율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비만율은 2000년 16%에서 2020년 23.5%로 올랐고 2030년에는 26.9%로 상승할 전망이다. 세계 최대 비만약 시장인 미국의 비만율 상승세는 더 가파르다. 미국 질병관리청(CDC)에 따르면 1999~2000년 30.5%이던 미국 비만율은 2021~2022년 41.9%로 폭등했다. 다시 말해 미국인 10명 중 4명 이상이 비만이라는 것이다.

마운자로는 임상시험에서 최대 22.5%, 위고비는 약 15%의 체중 감소 효과를 보여줬다. 이는 과거 지방 제거 수술에 필적하는 감량 효과다. 빅파마, 잇달아 항암 연구 철수비만약 성장의 그늘에 서게 된 항암제는 원래 제약업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과 혁신 가치를 인정받은 분야였다. 빅파마는 수십 년간 항암제 개발에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키트루다가 대표적인 사례다. 키트루다는 환자의 면역 기능을 활성화해 암세포를 공격하게 하는 ‘면역관문 제제’라는 혁신적 기전으로 출시됐다. 기존의 세포독성 항암제와 달리 부작용이 적고 여러 암종으로 적응증을 끊임없이 확대해 수년간 글로벌 의약품 시장의 매출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이제 항암제는 빅파마가 앞다퉈 발을 빼는 분야로 전락했다. 빅파마는 신규 항암제 파이프라인 개발을 줄줄이 중단하고 차세대 비만 신약 후보물질 확보엔 거액의 투자와 소송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은 지난해 항암제 연구개발(R&D) 포트폴리오 개발의 상당 부분을 중단하고 2200명을 감원했다. 노보노디스크는 최근 90억덴마크크로네(약 2조원) 손실을 감수하고 세포치료 연구를 완전히 중단한 뒤 파킨슨병·만성심부전·제1형 당뇨병 치료제 개발을 위한 줄기세포 연구 프로그램을 폐기했다. 구조조정 인원만 9000명에 달한다. 반면 경구용·주사형 비만약을 개발 중인 멧세라에는 90억달러(약 12조8000억원)에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멧세라 인수는 지난 8일 100억달러(약 14조5000억원)를 제시한 화이자의 최종 승리로 끝났지만, 글로벌 빅파마가 신규 비만약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소송전까지 불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존 R&D 전략을 뒤집는 건 비만약 시장에 ‘올인’하기 위해서다. 마이크 도우스트다르 노보노디스크 CEO는 “과거 우리는 파킨슨병 세포치료나 심부전 치료처럼 핵심 역량 밖의 영역에 자원을 분산해왔다”며 “이제는 비핵심 자산을 과감히 정리하고 핵심 영역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CEO는 “우리는 비만약 개발에 올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벤처캐피털(VC)의 자본 흐름도 비만으로 물줄기를 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지난해 비만약 관련 라이선싱과 인수합병(M&A)은 전년 대비 두 배 늘었다. JP모간은 비만 치료제 투자를 위한 5억달러(약 7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