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글판' 35년…詩로 이어온 위로와 희망

입력 2025-11-12 18:13
수정 2025-11-12 23:24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가을을 맞아 지난 9월부터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외벽 ‘광화문글판’(사진)에 새겨진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芝)에게’의 한 구절이다. 삶이 고단하고 지치더라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된다는 의미가 담겼다. 매년 3월과 6월, 9월 그리고 12월. 사계절이 바뀌는 초입마다 가로 20m, 세로 8m 크기의 광화문글판은 새 단장을 한다.

교보생명은 12일 광화문글판 35년을 맞아 시민이 직접 뽑은 ‘베스트 광화문글판’을 공개했다. 온라인 투표에 시민 2만2500명이 참여한 결과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글판은 2009년 가을에 걸린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속 한 구절이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개/천둥 몇개, 벼락 몇개’. 견디며 익어가는 인내와 회복의 메시지가 많은 이에게 울림을 줬다. 그 밖에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비롯해 나태주 ‘풀꽃’, 문정희 ‘겨울 사랑’, 정현종 ‘방문객’ 구절 등이 상위권에 올랐다.


광화문글판은 1991년 1월 고(故)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아이디어로 출발했다. 첫 글판은 ‘우리 모두 함께 뭉쳐/경제활력 다시 찾자’였다. 이후에도 ‘훌륭한 결과는/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 ‘개미처럼 모아라/여름은 길지 않다’ 등 초기엔 계몽적 성격의 다소 직설적인 메시지가 담긴 표어가 대부분이었다.

광화문글판이 지금처럼 시가 있는 도시의 풍경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건 1998년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신 창립자는 시민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글판에 걸린 글귀는 고은 시인의 ‘낯선 곳’ 구절 ‘떠나라 낯선 곳으로/그대 하루하루의/낡은 반복으로부터’다.

이후 2000년부터는 문인, 언론인, 평론가 등으로 구성된 문안선정위원회가 광화문글판을 정하고 있다. 교체 시기는 2003년부터 계절 변화에 맞춰 연 4회로 정례화됐다.

지난 35년간 총 117편으로 광화문 사거리를 장식한 광화문글판은 우리 사회 시대상을 비추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채 30자가 안 되는 짧지만 강렬한 한 문장이 지나가는 시민에게 자아 성찰의 기회를 주고 감정적 치유의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초등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에 광화문글판을 소개하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교보생명은 전날 교보생명 빌딩 대산홀에서 ‘광화문글판 35년 북콘서트’를 열고 ‘베스트 글판’으로 뽑힌 문안 작가인 장석주·도종환·나태주·문정희 시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시인들은 이날 무대에 올라 직접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북콘서트에 참석한 대학생 이승연 씨는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더라도 글판을 보기 위해 광화문을 일부러 찾아오곤 한다”고 말했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35년 동안 광화문글판은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는 시민들의 벗으로 자라났다”며 “앞으로도 광화문글판이 시민의 일상에서 짧은 휴식, 미래 희망을 건네는 문화의 창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