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석유화학 기업 이네오스가 중국 기업 등을 무더기로 유럽연합(EU)에 반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일부 화학제품을 정상 가격보다 유럽에 싸게 수출해 자사에 피해를 줬다는 이유에서다. EU는 회원국 무선 및 핵심 통신망에서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와 ZTE를 퇴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이는 모두 EU가 최근 강조하는 ‘경제 안보 전략’의 연장선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 저가 수입으로 화학산업 ‘직격탄’11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최근 이네오스는 해외 저가 화학제품 수입에 맞서 EU에 반덤핑 소송 10건을 제기했다. 이네오스는 “제조업 근간인 유럽 화학산업이 아시아와 중동, 미국에서 유입되는 저가 수입품 쓰나미에 잠식당하고 있다”며 “이런 제품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너지 가격과 일방적인 탄소 관련 비용을 부담하는 유럽 생산자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렸다”고 강조했다.
유럽화학산업협회(CEFIC)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EU의 중국 화학제품 수입은 전년 동기보다 8.3% 증가했다. 지난해 EU 회원국의 중국산 화학품 수입액은 440억700만유로(약 74조4528억원)에 달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총 33건의 반덤핑 혐의 관련 조사에 착수했다. 이는 2006년 이후 가장 많은 조사 건수다. 이 중 3분의 1 이상이 화학제품과 관련돼 있다.
이네오스가 최근 제기한 10건의 반덤핑 소송 대상 품목에는 부동액, 브레이크액, 윤활유를 생산하는 데 쓰는 폴리염화비닐, 다양한 의약품 제조에 필수인 부탄디올 등이 포함된다. 이네오스는 해당 제품이 15개 이네오스 생산시설에서 제조하고 숙련된 인력 50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네오스가 제소한 회사에는 한국, 대만, 미국 기업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짐 랫클리프 이네오스 회장은 “공정한 경쟁의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유럽은 자국 화학산업이 탄소세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는 상황에서 석탄을 사용한 중국산 제품은 수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중국산 통신 설비도 타깃EU는 경제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회원국의 핵심 통신망에서 중국산을 퇴출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EU 집행위가 5년 전 ‘통신망에서의 고위험 공급 업체 사용 중단’에 관한 권고를 법적 구속력을 갖춘 규정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 방안은 헤나 비르쿠넨 EU 기술 주권·안보·민주주의 담당 수석부집행위원장이 주도하고 있다. 비르쿠넨 부집행위원장은 회원국이 초고속 인터넷 접근권 확대를 위해 설치 중인 첨단 광대역망과 5세대(5G) 통신 핵심 인프라에서 중국산 장비 사용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앞서 EU는 화웨이와 ZTE를 ‘고위험 공급 업체’로 규정한 적이 있다.
EU의 통신 인프라 관련 결정은 각 회원국 정부 권한이다. 하지만 이번 계획이 채택되면 회원국은 집행위 보안 가이드라인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EU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개시되는 제재 절차인 ‘위반 절차’가 가동되고 재정적 제재가 뒤따를 수 있다.
최근 중국과 무역 및 외교 갈등이 심화하자 EU에서는 국가 주요 기반시설이 중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 통제 아래 놓일 경우 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토마스 레니에 EU 대변인은 “5G 네트워크 보안은 EU 경제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하며 회원국에 위험 제거 조치를 신속히 시행하라고 촉구했다.
다만 화웨이 퇴출을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일부 국가에선 강한 반발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스웨덴과 영국 등은 수년 전부터 중국산 설비 사용을 금지해왔다. 하지만 스페인과 그리스 등은 중국산을 쓴다. 이에 따라 일부 회원국은 통신 인프라 결정권을 EU로 이양하는 것을 꺼린다. 통신사업자도 화웨이 장비가 서방 기업 제품보다 저렴하고 성능이 우수하다는 이유를 들어 신규 조치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정부는 EU의 이런 움직임에 즉각 반발했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법적 근거와 사실적 증거 없이 행정 수단으로 제한을 강제하고 심지어 기업의 시장 참여를 금지하는 것은 시장 원칙과 공평 경쟁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