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최장기간 연방정부 셧다운(부분 업무정지) 사태가 일부 글로벌 공급망을 강타했다. 국경의 문은 열려있지만 미국 정부의 관련 시스템이 멈추면서다. 셧다운이 해제해도 의약품, 신선식품 등 이른바 '부패성 화물'은 미국 내 유통이 당분간 힘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미국 통관 전문 심사 기관 '마비'11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연방 정부 셧다운에도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은 정상 가동했다. 하지만 식품의약국(FDA), 환경보호청(EPA) 등 수입품의 안전을 최종 승인하는 참여 정부 기관(PGA·Participating Government Agencies)의 기능은 마비됐다.
미국의 통관 절차는 단일 창구가 아니다. CBP가 최전선에서 국경 보안, 화물 검사, 관세 징수를 담당한다. 하지만 수입품의 안전성, 환경 규제 준수, 소비자 보호 기준 등 충족 여부는 각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FDA, EPA,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CPSC), 농무부(USDA) 등이 최종 검증한다. CBP가 문지기라면 PGA는 각 물품의 적격성을 판단하는 전문 심사관인 셈이다.
CBP는 법률 집행 및 치안 관련 기관으로 분류된다. 셧다운 상황에서도 약 90%의 인력을 '필수 인력'으로 유지하며 항만과 국경에서 정상 가동했다. 국경 안보 유지와 연방 재정의 주요 수입원인 관세 징수를 지속하기 위해서다. 글로벌 해운사 머스크는 지난달 고객 공지를 통해 "CBP가 셧다운 기간에도 정상 운영 중이며 모든 입국 항구에 직원이 배치돼 화물 처리가 평소와 같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 심사관(PGA)이 업무를 보지 못하면서 합법적인 화물이 움직이지 못하는 '행정적 병목'이 발생했다. 미 보건복지부(HHS)에 따르면 FDA는 셧다운에도 전체 인력의 86%를 유지했다. 다만 FDA 예산의 상당 부분은 정부 예산이 아닌, 제약사나 의료기기 회사가 지불하는 '사용자 수수료'로 충당된다. 신약 허가 심사 인력은 셧다운에도 업무를 지속할 수 있다. 86%의 인력은 대부분 이런 사전 허가 업무에 집중돼 있다.
항구와 공항으로 입항하는 수천 건의 수입 화물을 검사하는 등 '수입 운영' 인력은 연방 예산에 상당수 의존한다. 이번 셧다운으로 생명·보건 관련 심사 업무의 필수 인력만 계속 일했다.
EPA와 CPSC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EPA는 전체 인력 중 11%만이 근무했다. 화학물질, 농약, 특정 살균 기능 제품(K-뷰티 LED 마스크 등) 관련 수입 통지 등 수동 승인 절차가 사실상 중단됐다. CPSC는 약 45%의 인력을 유지했지만 비긴급 수입 심사는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썩어가는 화물칸PGA(사전검역 심사) 지연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항만 내 화물 적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화물이 통관 대기 상태로 장기간 머무는 ‘보세 체류’의 증가다. 이 현상은 공급망의 비용 구조를 흔들었다. 합법적인 수입 화물들이 통관 허가를 기다리며 보세 냉장창고에 하루, 이틀, 혹은 일주일 이상 머무는 일이 잦아졌다. 이 과정에서 수입업자들은 두 가지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된다.
우선 ‘부패 손실’이다. 신선식품이나 온도 민감성이 높은 의약품, 고가 화장품 등은 유통기한이 짧아질수록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결국 폐기 위험이 급증하고, 이는 곧바로 손실로 이어진다. 다음은 ‘체선료’와 ‘보세창고 추가 보관료’다. 통상적인 물류 흐름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을 비용이지만, 통관 지연이 길어질수록 현금 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PGA 심사 지연은 단순한 행정 문제를 넘어, 공급망 전반의 비용 효율성과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구조적 리스크로 작용했다.
일부 수입업자들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식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해상 운송을 포기하고, 단가가 훨씬 높은 긴급 항공 운송을 택했다. 이 선택은 전 세계 항공 화물 시장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관련 수요는 늘고, 공급은 제한된 상태에서 시장은 불균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항공 운임이 치솟았다.
글로벌 항공화물 운임 대표지수인 'TAC 인덱스'에 따르면 지난 3일까지 최근 4주간 기준 글로벌 항공운임지수(BAI00)는 전월 대비 7.6% 상승했다. 노선별로 보면 상승 폭은 더욱 극적이다. 아시아발 고부가가치 화물 수요를 반영하는 상하이발(BAI80) 운임은 4주간 16.6% 급등했다. 홍콩발(BAI30)도 5.8% 상승했다.
유럽산 의약품 및 화장품의 긴급 수송 수요를 반영하는 프랑크푸르트발(BAI20) 운임은 같은 기간 18.7% 폭등했다. 이는 유럽발 화물이 대서양 횡단 해상 운송의 병목을 피해 항공 운송으로 대거 전환된 결과로 해석된다.
닐 윌슨 TAC 인덱스 수석 분석가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10월 항공 운임 급등은 전통적인 연말 성수기, AI 붐으로 인한 반도체 수요, 그리고 셧다운 발 긴급 우회 물량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특히 프랑크푸르트발(유럽산 의약품/화장품)과 상하이발(전자상거래/반도체) 수요가 강력하다"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셧다운이 항공사 매출을 끌어올린 것은 아니다. 셧다운으로 FAA(연방항공청) 역시 지원 인력 감축과 관제사들의 피로 누적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미국 주요 30개 공항에서 관제사 20~40%가 미복귀했으며 일부 공역 폐쇄 가능성 경고까지 나왔다.
결국 FAA는 안전성 확보를 이유로 지난 7일 전국 40개 고밀도 공항의 항공기 운항을 오는 14일까지 단계적으로 최대 10% 감축하라고 명령했다. 해당 조치로 약 1800편의 항공편과 26만8000석 규모의 감축이 추산된다.
이 조치는 항공 화물 시장에 '이중 병목 현상'을 야기했다. 국제선 화물기나 여객기로 LAX(로스앤젤레스), JFK(뉴욕), ORD(시카고) 등 관문 공항에 도착한 화물이, 미국 내 최종 목적지로 가는 '국내선 환적' 단계에서 2차 장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미국 땅을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라스트마일'에도 병목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온도 관리가 생명인 콜드체인(저온 유통망) 의약품 배송이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 산업 영향은최근 셧다운에 따른 물류난은 2021~2022년 팬데믹 시기의 전면적 공급망 붕괴와는 다르다는 분석이다. 이번에는 특정 산업과 품목에만 비용 압력이 집중되는 이른바 ‘선별적 병목 인플레이션’이 특징이다. 글로벌 물류가 전반적으로 마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규제가 복잡한 일부 고부가가치 제품군에 미국 내 병목 현상이 집중되고 있다. 반도체, 의약품, 고가 화장품, 기능성 미용기기 등 사전확인 규제를 받는 고부가가치 제품일수록 행정 리스크에 노출되기 쉽다는 점이 이번에 드러났다.
이번 미국발 행정 병목 사태는 한국의 대표 수출 산업인 K-바이오와 K-뷰티에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바이오시밀러(2~8℃ 콜드체인 필수 유지) 수출 기업들은 ‘기존 물류 체계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들은 원래 해상 운송보다 항공 운송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항공망이 흔들리면 수출 구조 전체가 흔들린다. 우선 물류비 상승 부담이 커졌다. 상하이발 기준 BAI80 항공 운임이 최근 16.6% 급등하면서다.
더 심각한 리스크는 ‘라스트마일’ 콜드체인 붕괴 가능성이다. FAA의 국내선 10% 감편 조치로 시카고(ORD), 댈러스(DFW) 등 미국 주요 관문 공항에 도착한 바이오시밀러가 내륙 병원 등으로 제때 옮겨 싣게 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관련 의약품은 2~8℃ 범위를 24시간 이상 벗어나면 품질이 보장되기 어렵다. 환적 실패나 지연이 발생하면 일부 제품은 폐기할 수 밖에 없다.
K-뷰티 업계는 미국 규제 기관의 행정 마비로 직격탄을 맞았다. 기능성 화장품이나 일부 미용기기 등은 단순한 뷰티 제품이 아니다. FDA(식품의약국)의 의료기기 규제에 더해 EPA(환경보호청)의 살균·항균 기능 관련 승인 등도 받아야 한다. 이들 기관의 승인 없이는 통관과 판매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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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