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시체의 춤, 부토의 황홀

입력 2025-11-07 09:52
수정 2025-11-12 10:44
1913년 5월 29일,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는 공연 도중 사람들의 야유와 항의가 빗발치고, 관객들끼리 멱살잡이가 일어나며 경찰까지 들이닥치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발레 뤼스의 신작 <봄의 제전>이 초연되던 날의 모습이다. 당시 상황은 난장판이었지만 이 작품의 음악도, 춤도, 위대한 예술적 유산이 되어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창작자들이 자신만의 해석으로 새로운 <봄의 제전>을 내놓는 건 일종의 예술적 의식과도 같다. <봄의 제전>이 이번에는 부토로 탄생했다. 이번 <봄의 제전>은 부토를 이끄는 양대 예술단체 중 하나인 다이라쿠다칸(大駱駝艦)의 한국인 무용수 양종예가 안무와 연출을 맡고 직접 출연까지 한 작품이다. (2025년 10월 28일~11월 3일)



6년 만의 오픈, 빈 항아리 ‘코츄텐’ 안에 담은 부토

매해 도쿄 현지인들이 가장 살고 싶은 동네 1위로 꼽히는 키치조지. 다이라쿠다칸은 키치조지에 터를 잡고 있다. ‘코츄텐(壺中天)’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이라쿠다칸의 이 공간은 연습실이자 부토 공연장이다. ‘코츄텐’은 항아리라는 뜻을 갖고 있다. 머리를 모두 밀거나 때로는 나신의 상태로 춤을 추며 자신의 빈 몸에 춤과 혼을 채워 넣는 부토의 정신이 이 공간의 이름 안에서도 드러난다. <봄의 제전> 공연 첫날, 1시간 전부터 관객들은 코츄텐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일본 내에서는 부토의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을 뿐 아니라, 가까이에서 날 것 그대로의 춤과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코츄텐의 공연을 좋아하는 관객층이 탄탄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코로나로 인해 6년간 문을 닫았던 코츄텐이 다시 문을 여는 공연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코츄텐은 30~4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스튜디오지만 첫날 공연에 약 70명의 관객이 이곳을 찾았고, 총 8회 진행된 전 공연이 모두 매진되는 인기를 누렸다. 다이라쿠다칸 코츄텐의 공연을 기다린 건 일본 현지인뿐이 아니었다. 다양한 국적의 관객들이 모여 부토를 보기 위해 빼곡하게 껴서 앉는 상황을 기꺼이 감수했고, 한국인 관객들도 다수 눈에 띄었다. 공연장에서 마주친 한국의 전환성 무용수는 “관객들이 입장하는 모습부터 부토였다”며 예술적 자극을 강하게 받은 공연이었다는 감상을 전했다.



<봄의 제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 작품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 이름표를 달았을까. 안무자이자 연출자인 양종예는 발레 뤼스의 <봄의 제전>을 처음 봤을 때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자신의 내부에서 경련이 일어났고, 마치 접신을 한 것처럼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모습이 부토 같았다고. 그 당시에 신랄한 비난을 받은 작품이 지금은 걸작으로 자리매김했듯이 예술의 길은 그런 격렬한 경련의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음악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아티스트 콘스탄트 비죵(Constant Voisin)과 함께 했다. 이번 <봄의 제전>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자기 이야기를 부토로 써 내려간, 봄을 향한 제전이다.



검은 칠 ‘크로누리’의 몸, 내면의 어둠과 나란히 서다

무대의 장막이 올라가고 마주친 첫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5명의 부토 예술가들이 반나체의 몸을 하얗게 칠한 채 매달려있었다. 마치 안이 텅 비어 있는 인형 같은 그 빈 몸들. 양종예는 ‘이들의 몸을 빌려서 춤을 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영화 <솔라리스>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첫 장면에서는 ‘생각하는 바다’를 통해 자신의 기억과 내면세계와 실존을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를 담았다. 이후 한명이 합류해서 6명의 부토 예술가들은 밀짚 모자를 쓴 소녀가 되기도 하고, 밑바닥이 뚫려있는 양동이를 들고 나타난 여인이 되기도 한다. 양종예는 이 ‘정체불명의 엑스’가 모두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밀짚모자를 쓴 소녀들의 모습은 연약하고 귀여워 보이지만 그 밝고 순수한 모습은 본인이 갖고 있는 가장 용기 있는 모습이라고 고백한다. 구멍 난 양동이를 들고 나타난 여인은 로댕의 조각 작품 <다나이드>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이다. 구멍 난 그곳에 영원히 물을 채우는 형벌을 받은 다나이드처럼 예술에, 춤에 목마르지만 채울 수 없는 물을 계속 길어나르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후에 등장하는 ‘엄마에게’ 장면은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로 만나는 세계인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느끼는 양가 감정을 담았다.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미워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감정을 어찌할 줄 몰라 부토 안에 쏟아냈다. 양종예 스스로는 이 작품의 시작점은 엄마에 대한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었다고 말한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나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을 가장 사로잡은 건 양종예 자신의 등장 장면이었을 것이다. 보통 부토에서는 온몸을 하얗게 칠하는 ‘시로누리(白塗り)’ 분장을 한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양종예는 반라의 상태에 검은 칠을 한 ‘크로누리(?塗り)’로 등장한다. 크로누리의 첫 도전이기도 했다. 자신의 어두운 내면, 겉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감춰져 있는 모습을 꺼내기 위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크로누리 상태에 피눈물을 상징하는 붉은 실을 눈 밑에 매달고, 멈출 수 없는 춤의 운명을 상징하는 빨간 신발로 등장한 그 모습에는 이 작품의 모든 서사가 농축되어 있었다.



양종예는 춤에 대해서 “벗어 버리고 싶지만 발목을 자르지 않으면 벗을 수 없는 빨간 구두의 운명처럼 제게 춤이란 지옥과 천국의 순간이 매순간 교차하는 평생의 굴레이며 눈물”이라고 말한다. 작품의 마지막에는 크로누리한 그 몸 위에 금분이 칠해진다. 미러볼 앞에서 번쩍이는 금빛 몸으로 추는 그의 춤은 제례이자 숭배이자 운명이자 그리고 사랑이다.



양종예는 10년 전 무릎 인대가 끊어지며 무용수로서 심적 지진을 겪었다. 그런 그가 이제 50살이 되어 자신을 돌아봤다. 다리에 붕대를 감고 절뚝거리는 부토 예술가의 몸을 통해 그때의 심정을 담았고, 사슴 머리를 들고 계속 춤을 추는 장면에 신념을 담았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이케자와 나쓰키 소설 <스틸 라이프>의 프롤로그 일부를 낭독했다. “네 곁에 서 있는 세계 말고도 또 다른 세계가 네 안에 있다. 너는 가만히 상상해본다. 네 안에 숨어 있다는 그 세계를. 그 광대한 세계는 언제나 어두컴컴하다.” 그 문장을 통해 정물화(스틸 라이프)가 되어 자신을 바라본다. 미워했고 감추고 싶었고 차마 쳐다보기 싫었던 어둠을, 그것 옆에 나란히 서서 부토의 터널을 통해 바라볼 수 있었다. 벗겨지지 않은 빨간 신발은 그를 예술의 제물로 삼았지만, 기꺼이 제물이 되었기에 빨간 피눈물 사이에서도 운명을 마주할 힘을, 어둠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소녀는 50이 되었다. 피눈물을 무대 위에 승화시키며 빨간 신발을 신고 여전히 춤을 출 수 있는 멋진 50이 되었다.



도쿄=이단비 무용 칼럼니스트 ? <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