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30일 서울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치맥(치킨+맥주) 만남’을 했다. 회동 장소는 친한 친구, 동반자를 뜻하는 ‘깐부’가 상호에 들어간 프랜차이즈 치킨집. 글로벌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자동차 시장을 이끄는 거물들은 이날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 산업계에선 이번 만남을 계기로 세 회사가 끈끈한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글로벌 AI산업에 하나의 축을 마련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깐부 치맥’ 회동
젠슨 황 CEO는 이날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은 뒤 곧바로 서울 삼성동 인근 ‘깐부치킨’ 매장에서 이 회장과 정 회장을 만났다. 젠슨 황 CEO가 한국에 온 건 2010년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의 히트게임 ‘스타크래프트2’ 글로벌 출시 기념 파티 이후 약 15년 만이다. 이날 만남은 젠슨 황 CEO의 깜짝 제안으로 성사됐다.
회동 장소는 엔비디아가 골랐다. 서민 음식을 즐기는 젠슨 황 CEO가 소박한 치킨집에서 편안하게 대화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두 회장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 경북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 참석한 이 회장과 정 회장은 이날 서울로 복귀해 젠슨 황 CEO를 맞이했다. 세 사람은 지난 8월 25일 미국 워싱턴DC 윌러드호텔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리셉션 이후 2개월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은 정 회장의 제안으로 팔을 엮어서 소맥 ‘러브샷’도 했다.
젠슨 황 CEO는 이 회장과 정 회장에게 한 병에 600만원에 달하는 일본산 싱글 몰트 위스키 ‘하쿠슈 25년산’에 사인한 뒤 선물로 건넸다. 이어 엔비디아가 개발한 초소형 AI 슈퍼컴퓨터 ‘DGX 스파크’도 선물했다. DGX 스파크에는 삼성전자가 생산한 데이터저장장치인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가 장착됐다.
이날 회동에서 이 회장은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된 좋은 시점에 만났다”고 했고, 정 회장은 “한·미 관계가 더 좋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젠슨 황이 공개한 이건희 회장과 인연
젠슨 황 CEO와 이 회장, 정 회장은 치맥 회동 이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지포스’ 출시 25주년 행사 단상에 올랐다. 무대에 오른 젠슨 황 CEO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과의 인연 얘기를 꺼냈다. 그는 “1996년 한국에서 매우 아름다운 편지를 받았는데, 누가 보냈는지는 몰랐다”며 “그 편지는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보낸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처음 한국을 찾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 선대회장은 ‘모든 한국인을 인터넷으로 연결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으며, 그 생각은 지금의 엔비디아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엔비디아 반도체 동맹 강화
이들은 젠슨 황 CEO가 31일로 잡은 한국 대기업과의 협력 발표를 앞두고 세부 내용을 최종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젠슨 황 CEO의 방한을 계기로 삼성전자, SK, 현대차, 네이버 등 국내 주요 기업에 AI 가속기(AI 학습·추론에 특화한 반도체 패키지) 등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을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는 AI 서버의 필수재로 꼽힌다. 개당 5000만원 넘는 가격에도 늘 공급이 부족하다. AI 서버를 활용해 서비스를 고도화하는 빅테크뿐만 아니라 AI산업을 일으키려는 각국 정부의 러브콜이 쇄도해서다. 그런 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엔비디아의 AI 가속기를 경쟁업체보다 빨리 받을 수 있게 되면 그 자체가 선물이다.
엔비디아는 현대차그룹에 AI 가속기 등 첨단 반도체를 공급하고, 현대차는 엔비디아 반도체를 활용해 자율주행·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로봇 등 미래모빌리티 기술을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1월 엔비디아와 로봇, 자율주행, 스마트공장 등 AI 기반 기술 개발을 위한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삼성전자와는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 공급과 관련한 구체적 내용이 나올 것으로 업계는 예상했다. 삼성전자는 30일 실적발표회에서 최근 엔비디아에 5세대 HBM인 HBM3E 납품을 시작했고, 차세대 제품인 HBM4 샘플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AI 추론 서버용 D램인 LPDDR5X, GDDR7 등을 매개로 한 삼성전자와 엔비디아의 동맹이 한층 더 굳건해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선 엔비디아, 삼성전자, 현대차를 잇는 ‘3각 AI 동맹’ 가능성도 거론된다. 젠슨 황 CEO가 “(APEC) 현장에서 발표할 것이 많고, 이 내용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알고 있다”고 말한 만큼 미국 본토에서 협력하는 방안이 나올 것이란 관측도 있다. 예컨대 엔비디아의 AI 칩을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짓고 있는 파운드리 공장에서 생산해 현대차 자율주행차나 로봇에 공급하는 식이다. 젠슨 황 CEO는 31일 경주 APEC CEO 서밋에서 특별 강연을 한 뒤 기자간담회를 연다.
김채연/신정은/강해령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