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수요와 ESS가 불러온 반전…‘개미 무덤’ 배터리의 귀환

입력 2025-11-04 08:12
수정 2025-11-04 08:13
[비즈니스 포커스]




한때 ‘개미 무덤’이라 불리며 장기 침체에 빠졌던 2차전지(배터리) 주가 돌아왔다. 10월 들어 국내 주요 2차전지 ETF가 한 달 만에 70% 이상 급등하며 반도체 ETF의 수익률을 뛰어넘었다. AI(인공지능) 확산과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 폭증이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하면서 배터리 산업이 다시 한국 증시의 중심으로 복귀하고 있다.

“한 달 만에 108%”…ETF 급등이 알린 귀환

한국거래소와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10월 한 달(29일 기준) 동안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ETF는 ‘KODEX 2차전지산업레버리지’(107.6%)였다. ‘TIGER 2차전지TOP10레버리지’도 86.3% 상승했다.

이들 상품은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이노베이션, 포스코홀딩스, 에코프로, 포스코퓨처엠 등 국내 주요 배터리 기업으로 구성된 지수를 2배로 추종한다. 즉 주가 상승 시 수익이 두 배로 확대되는 구조다.

같은 기간 ‘TIGER반도체TOP10레버리지’(61.7%)와 ‘KODEX 반도체레버리지’(54.1%) 등 반도체 ETF 수익률을 크게 앞질렀다. 코스피 4000 돌파를 이끈 반도체에 이어 2차전지가 증시의 ‘새로운 엔진’으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AI가 불붙인 ESS 붐…배터리의 ‘두 번째 시장’

이번 반등의 중심에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와 ESS 수요 급증이 있다. AI 서버를 위한 데이터센터 확충이 빠르게 늘면서 전력 부하를 분산하고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흡수할 ESS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AI 학습용 GPU 서버 한 대는 일반 클라우드 서버 대비 전력 소모가 10배에 달한다. 이에 따라 미국과 유럽의 주요 데이터센터는 ESS를 전력망 안정화의 필수 인프라로 채택하고 있다. ESS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고 대형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급 불균형을 조정하는 장치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ESS 시장 규모는 2024년 235GWh에서 2035년 618GWh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JP모간은 올해 글로벌 ESS 시장이 전년 대비 80% 이상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AI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의 39%를 차지하는 미국 시장의 ESS 배터리 수요는 2024년 35GWh에서 2030년 76GWh로 2배 성장이 예상된다. 정책과 지정학도 호재로 작용한다. 미국의 대중국 관세 부과와 유럽의 중국산 LFP 규제 움직임은 중국 업체에 대한 가격 경쟁력을 약화하고, 상대적으로 국내 제조사에 우호적 환경을 조성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용욱 한화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 전기차(EV) 보조금 축소로 주춤했던 국내 2차전지 업종에 ESS 기대감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며 “유럽의 전기차 수요 회복과 중국의 배터리 소재·기술 수출 통제도 국내 배터리 기업들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테슬라 잡은 삼성SDI…K배터리, ESS 전환 속도전

국내 배터리 3사는 ESS 시장 선점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6월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 공장에서 ESS 전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양산을 시작했다. 이는 글로벌 대형 배터리 제조사 중 처음이다.

증권가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이익 중 ESS 비중은 2025년 14%에서 2026년 47%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LG에너지솔루션의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은 601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4.1% 늘었다.

삼성SDI는 테슬라와 ESS(에너지저장장치)용 배터리 공급을 추진한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SDI와 테슬라는 ESS용 배터리 계약을 논의 중이다. 계약 규모는 10GWh 안팎으로, 금액이 조 단위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 합작한 ‘스타플러스에너지(SPE)’를 통해 미국 현지에서 NCA(니켈·코발트·알루미늄) 기반 배터리 라인을 가동 중이며 내년 4분기 LFP 라인 전환을 앞두고 있다. 삼성SDI가 테슬라와 계약을 체결하면 SPE 일부 라인을 전환해 ESS용 배터리를 생산할 가능성이 높다.

올해 3분기 영업손실 5913억원으로 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지만 ESS 수주 확대를 통해 연내 흑자전환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종성 삼성SDI 부사장은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AI 산업 성장과 친환경 발전 확대로 ESS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며 “중국산 규제 강화와 안정성이 높은 각형 폼팩터 선호 증가로 미국 내 각형 배터리 생산능력을 갖춘 기업의 기회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DI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각형 배터리를 공급한 유일한 비중국계 업체다.

SK온은 미국 재생에너지 기업 플랫아이언과 1GWh 규모 ESS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향후 6.2GWh 규모의 추가 프로젝트 우선협상권을 확보했다. 일부 전기차 생산 라인을 ESS용으로 전환하면서 수익성 회복을 노리고 있다. SK온의 3분기 1248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으며, 내년 ESS 공급 확대에 따른 실적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




본격 회복은 ‘EV 정상화’에 달려

시장에서는 이번 랠리를 코스피 4000 시대의 ‘두 번째 순환매’로 보고 있다. 반도체 중심의 1막이 일단락되면서 산업재·소재·배터리 등 수출 중심 업종이 2막의 주도 섹터로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한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반도체 랠리의 피로감이 누적되며 산업재·소재 중심의 순환매가 본격화됐다”며 “중국의 공급 축소 조짐은 국내 배터리·소재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진투자증권 분석에 따르면 9월 말 이후 코스피 상승을 주도한 업종은 반도체뿐 아니라 배터리, 비철금속, 화학, 기계 등 수출 중심 산업이었다. 허 애널리스트는 “내수보다 수출이 시장의 힘을 이끌고 있다”며 “AI와 반도체가 주도 업종 지위를 유지하더라도 중국의 공급 축소가 본격화될수록 배터리 등 소재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업황 개선이 곧바로 실적 회복으로 이어지기엔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전기차(EV) 수요가 여전히 배터리 산업의 근본 수요 기반인 만큼 EV 시장의 정상화가 향후 회복의 열쇠로 꼽힌다.

영국 시장조사업체 로모션에 따르면 9월 글로벌 전기차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20% 증가한 210만 대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세제 혜택 종료 전 ‘선구매 효과’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CATL·BYD의 저가 LFP 공세, 트럼프 행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정책 방향 변화 등 리스크도 존재한다.

장정훈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AI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ESS 수요 증가는 긍정적이지만 북미 배터리 공장 가동률을 본격적으로 끌어올리기엔 한계가 있다”며 “전기차 시장의 정상화 없이는 ESS만으로 산업 전반의 실적 회복을 이끌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실제 올해 미국 ESS 시장은 약 40GWh 규모, 전체 2차전지 수요의 20% 수준에 그친다. 2025년까지 80~90GWh로 성장하더라도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능력(약 290GWh)에 비해 여전히 제한적이다.

그런데도 이번 반등은 단순한 테마성 급등과는 결이 다르다는 평가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ESS 전용 라인 구축과 현지 생산 체제 강화에 나서면서 산업 구조 자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향후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설비가 늘수록 전력산업의 핵심 인프라로서 배터리의 역할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