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권리를 묻는다…연극 '고트'와 '호텔엔젤'

입력 2025-10-29 14:13
수정 2025-10-29 14:19
삶의 끝자락에 선 미래의 나를 상상해본다. 이미 의식을 잃었을 수도, 찢어지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고령화 시대, 죽음을 둘러싼 미지의 공포가 존엄사 논의에 불을 붙였다. 스위스 벨기에 등 일부 유럽 국가는 환자가 의사 처방을 받아 스스로 삶을 품위 있게 마무리하는 조력사를 합법화했다. 한국에선 조력사가 불법이지만 소극적 의미의 연명치료 중단은 허용된다.

무대에서도 '인간다운 죽음'을 논하는 작품들이 속속 오르고 있다. 최근 방영한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 이어 막을 올린 조력사 관련 연극 두 편을 소개한다.


"생명은 누구의 것일까"

"아내가 죽고 내 삶이 반 토막 났습니다. 난 그냥 조용히 죽고 싶습니다."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개막한 '고트'(Gott)는 연극이라기 보다 조력사에 관한 공청회에 가깝다. 무대를 반원 형태로 감싸 앉은 관객은 공청회에 참석한 시민처럼 한껏 몰입해 조력사를 다각도로 바라본다.

작품의 중심에는 은퇴한 건축가 '게르트너'가 있다. 그는 3년 전 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낸 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고민 끝에 독일 의료 연방기관에 조력사를 위한 약물 처방을 요청하지만 특별한 건강상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이 사안을 두고 게르트너와 변호사, 의사, 법학자, 종교인 등이 윤리위원회를 열고 치열한 논쟁을 펼친다.



게르트너의 변호사 '비글러'를 연기하는 원로 배우 예수정은 관객이 궁금해할 만한 질문을 대신 던지거나 토론자의 논리적 빈틈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무대 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때로 위트도 더한다. "생명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가톨릭 주교의 말에 "선물은 반품할 수도 있지 않나요?"라고 맞받으며 엄중한 객석 공기에 숨 쉴 틈을 준다.

탄탄한 대본과 물 흐르는 듯한 연기에 이끌려 어느새 찬성 쪽 주장과 반대 쪽 논리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자유 의지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기울다가도, "(조력사가 일반화되면) 사회적 약자들은 왜 살아 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라는 반대파 경고에 멈칫하게 된다.

실제로 지난 27일 공연 말미 관객을 대상으로 진행된 조력사 찬반 투표 결과는 찬성 36명, 반대 30명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기권도 25명에 달했다. 고트를 연출한 류주연 극단 산수유 대표는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두고 깊이 고민하는 시간 자체가 삶의 수준을 높이고, 그 의미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초연에 이어 이번 공연도 일찌감치 전석 매진됐다. 다음 달 2일지.

다시 만난 첫사랑의 선택



다음 달 개막하는 연극 '호텔엔젤'은 '고트'가 정면으로 다루는 조력사를 로맨스로 풀어낸다. 그것도 스무 해를 건너 다시 마주한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다.

어느 날, 하나뿐이던 가족인 할머니의 장례식을 끝낸 '정호' 앞에 첫사랑 '은희'가 나타난다. 20년 만에 돌아와 과거에 했던 약속, 신혼여행을 떠나자는 그녀. 그곳이 스위스였다는 것을 정호는 비행기에 오른 순간에야 깨닫는다.

새하얀 눈밭이 펼쳐진 스위스 알프스에서 이들은 눈사태로 호텔 방 안에 갇힌다.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이제는 함께할 수 없는 사이.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관계 속에서 삶과 죽음을 향한 근원적 질문을 마주한다.

무대에는 배우 두 명만 선다. 정호 역은 배우 김동규, 은희 역은 서송이 연기한다. 성우 서혜정이 무대 밖에서 내레이션을 더해 서정적 분위기를 이끈다. 배우와 작가, 연출을 병행하는 홍루현이 극을 썼다. 연출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시크릿 가든', '신사의 품격' 등을 연출한 권혁찬 PD가 맡았다.



첫 연극 연출에 도전한 그는 "관객은 '두 남녀가 첫사랑을 다시 이룰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극을 보게 되지만 결국 예상치 못한 국면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며 "너무 무겁지 않게 풀어가기 위해 유쾌한 장면도 곁들였다"고 했다.

'호텔엔젤'은 다음 달 개최하는 '월드 2인극 페스티벌' 공식 참가작으로 선정됐다. 공연은 다음 달 4일부터 6일까지 서울 대학로 창조소극장에서.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