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가을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은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다. 특히 3악장의 서정적인 클라리넷 연주,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이 차례로 음을 쌓아가며 들려주는 물결치는 사운드는 관객의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둔 울컥함을 건드린다.
서울시향은 가을의 정점을 찍고 있는 뉴욕 맨해튼에서 27일(현지 시각)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을 선보였다. 한국 오케스트라로는 처음으로 카네기홀 초청을 받아 공연했다.
라흐마니노프 서정성에 긴장감 입혀
지휘를 맡은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은 과거 뉴욕 필하모닉과 홍콩 필하모닉에 있을 때도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으로 청중들의 찬사를 받았다. 서정성 넘치는 이 곡에 긴장감과 속도감, 그 안에서도 선율 하나하나를 정확히 짚어가는 정교함을 입혔다. 츠베덴 음악감독은 카네기홀 공연에선 과거보다 더 강렬한 사운드를 끌어냈다는 평가다.
그가 곡을 이끌어가는 방식은 지휘하는 손끝만 봐도 알 수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츠베덴 감독은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으로,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휩쓴 뒤 16세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현악기 연주자 출신인 영향으로 지휘하는 손의 각도 하나로 음의 질감을 세밀하게 조정한다.
각 악장을 시작할 때 다른 지휘자보다 반 박자 빨리 시작하는 것도 독특하다. 연습 스윙 없이 곧바로 샷을 날리는 골프 선수와 비슷하다. 예고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습은 음악에서도 저돌적인 느낌으로 나타난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이 끝났을 때 객석에선 함성과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왔고, 대부분의 관객이 곧바로 일어섰다.
츠베덴 음악감독은 이날 연주를 앞두고“서울시향이 뉴욕 카네기홀에 초청받은 것은 교향악단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이고, 음악감독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한국의 대표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 무대에 서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국 관현악곡 ‘인페르노’ 초연
앞서 1부는 영화 ‘기생충’,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으로 유명한 정재일 작곡가의 관현악곡 ‘인페르노’(지옥)의 미국 초연으로 막이 올랐다. 인페르노는 츠베덴 음악감독의 의뢰를 받고 작곡한 정 작곡가의 첫 관현악곡이다.
마치 영화의 강렬한 첫 장면처럼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가 한꺼번에 ‘쾅’하고 내려치는 투티의 효과음으로 곡이 시작됐다. 객석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시작에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후 여러 음이 합쳐진 화성이 아니라 한 줄기의 선율로 곡이 진행됐다. 단선율의 멜로디는 다소 서글픈 느낌도 드는데 이 때문에 한국의 가곡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로움도 잠시, 오케스트라는 어두우면서도 폭발하는 사운드로 질주한다.
정 작곡가는 ‘인페르노’를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마지막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지옥의 풍경을 음악으로 형상화했다는 설명이 곡을 들으면 이해된다.
이후 무대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네덜란드 레지덴티 오케스트라의 상주 연주자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는 김봄소리의 연주에선 세련미와 화려한 기교가 함께 느껴졌다.
서울시향은 이날 공연 후 오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오클라호마 맥나이트센터에서 순회공연을 이어간다. 서울시향이 대규모 해외 순회공연에 나선 것은 2022년 유럽 순회공연 이후 3년 만에 처음이다.
뉴욕=박신영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