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가 명품과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이 동시에 둔화하고 있다. 두 상품군 모두 글로벌 중상위 계층의 재정 건전성과 소비 심리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꼽힌다. 모두 중국 시장에서 실적 악화가 주요 요인이다. 일각에선 저성장 국면으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두 선행지표의 동반 하락29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독일 스포츠카 브랜드 포르쉐는 지난 26일 올해 1~9월 누적 그룹 영업이익이 4000만 유로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1년 전(40억 3500만 유로)보다 99.0% 급감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명품 기업 LVMH는 올 3분기 유기적(자체 사업) 매출 증가율은 1%에 그쳤다고 밝혔다.
글로벌 중상위 계층의 소비 여력을 대표하는 명품과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은 올해 들어 뚜렷한 동반 침체를 보였다. 이는 코로나19 확산 특수의 소멸과 거시경제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포르쉐의 99% 이익 급감은 단순한 수요 둔화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전략적 실책, 거시경제 역풍, 국가 정책 충격 등이 동시에 덮친 '퍼펙트 스톰'의 결과였다. 영업이익률은 14.1%에서 0.2%로 추락했다. 3분기에만 약 9억 6600만 유로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기업공개(IPO)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는 분석이다. 시장 예상치였던 6억 1100만 유로 손실보다도 큰 적자였다.
가장 큰 요인은 값비싼 전기차 전환 전략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포르쉐는 새로운 전기차 플랫폼 개발 지연(약 17억 유로 상각 포함)과 배터리 관련 활동 등 전략 재조정을 위해 약 31억 유로에 달하는 막대한 특별 비용을 2025년 실적에 반영했다. 수익성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대한 선행 투자가 단기 실적을 어떻게 잠식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분석이다.
핵심 시장인 중국의 수요 약화도 결정적이었다. 올 1~9월 포르쉐의 중국(홍콩 포함) 인도량은 3만2195대로 전년 동기 대비 25% 급감했다. 포르쉐는 공식 발표에서 "중국 럭셔리 부문의 긴장된 경제 상황"을 언급하며 고수익 차량 판매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중국 시장에서 판매량 감소와 현지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가격 전쟁'은 전체 수익성 악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상치 못한 정책적 충격도 가해졌다. 미국 정부가 지난 8월 1일부터 유럽연합(EU)산 자동차에 대해 15%의 수입 관세를 적용하기로 결정하면서다. 포르쉐는 최대 판매 지역인 북미에서 추가 비용 부담을 안게 됐다. 포르쉐는 연초부터 3분기까지 관세 영향으로 영업이익에 약 5억 유로의 부정적 영향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올리버 블루메 포르쉐 AG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9월 전략 재조정을 발표하며 "현재 자동차 환경의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유연성을 높이고 변동성이 큰 환경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요헨 브레크너 포르쉐 AG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2025년이 포르쉐에 있어 바닥이며, 2026년부터 눈에 띄는 개선이 나타날 것"이라면서도 "이런 전략적 투자(전기차 전환)가 단기 재무 결과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이는 장기적인 회복탄력성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포르쉐의 위기가 고급차 시장 전반의 고민을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전기차로 전환이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글로벌 경기 둔화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수요의 벽’을 넘어 이제 ‘수익성의 벼랑’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이에 포르쉐는 순수 전기차 중심 전략에서 한발 물러섰다. 기존 내연기관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모델을 다시 포트폴리오에 포함했다. 일부 전기차 신차 출시 계획도 뒤로 미루기로 했다.1% 성장에 그친 '명품 제국'LVMH의 1% 성장은 명품 산업이 한 자릿수 성장의 '뉴노멀' 시대에 진입했다는 신호라는 분석도 있다. 시장의 비관적인 감소 전망보다 소폭 상회하기는 했다. 하지만 고속 성장의 시대가 끝났다는 지적이다. 올 1~9월 누적 매출은 581억 유로로 전년 동기 대비 2% 감소했다. 명품 수요의 둔화를 여실히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명품 산업의 성장 둔화는 지역별로 온도 차가 뚜렷했다. 유럽에서는 관광객 소비가 줄고 유로화 강세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3분기 매출이 2% 감소했다. 일본은 지난해 ‘엔저 특수’로 관광 소비 급증의 기저효과가 작용해 무려 13% 급감했다. 반면 미국은 3% 늘었고,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시장도 2% 성장하며 소폭 회복세를 보였지만 전체 흐름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LVMH 그룹의 핵심 사업인 패션·가죽제품 부문은 3분기에 2% 줄며 4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갔다. 다만 화장품 체인 세포라가 7% 성장하며 선택소매 부문이 선전, 그룹 전체 실적 하락 폭을 다소 완화했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올 상반기 실적 발표에서 "지정학적, 경제적 여건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LVMH는 견고함을 보여주었다"면서도 하반기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라고 밝히며 경계심을 보였다.
세실 카바니스 LVMH 최고재무책임자(CFO)는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중국 소비자 클러스터가 아주 근접하게 안정화 단계에 이르렀다"며 "여전히 마이너스지만 이제 한 자릿수 감소로 줄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럽 관광객 소비 감소를 실적 둔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며 "여전히 불확실성이 높은 도전적인 환경"이라고 밝혔다.
모건 스탠리의 에두아르 오뱅 유럽 명품 브랜드 리서치 총괄은 지난 5월 보고서에서 "우리는 오늘날 매우 다른 환경에 처해 있다"며 "팬데믹 이후 상당한 가격 인상으로 명품의 가격 결정력은 약화했고, 중국 수요는 기껏해야 보합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명품 시장 둔화의 핵심 요인으로 ‘가격 결정력의 약화’와 ‘문턱 소비자’의 이탈이 꼽힌다. 이들은 그동안 명품 호황을 이끌어온 주요 구매층이었다. 하지만 최근 경기 둔화와 생활비 부담 속에서 가장 먼저 소비를 줄였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명품업계는 줄줄이 가격을 인상하며 고가 전략을 강화했다. 하지만 최근 고금리와 자산 가격 정체 등 거시경제의 역풍이 이들의 지갑을 닫게 했다.
다만 최상위 부유층 고객 매출은 여전히 견고했다. 에르메스의 3분기 매출은 9.6% 증가했다. 프라다 그룹도 8% 성장했다. 반면 구찌를 보유한 케링 그룹은 3분기 구찌 매출이 14% 감소하는 등 부진을 겪었다.글로벌 시장의 지각 변동명품과 프리미엄 EV 시장의 동반 침체는 세 가지 거시경제 동인의 상호작용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팬데믹 기간 형성된 '초과 저축'과 '보복 소비' 심리라는 연료가 소진됐다.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자산 가격이 하락 압력을 받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른바 ‘역(逆)자산효과’가 현실화했다는 것이다.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가치가 떨어지면 소비자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돼 지출을 줄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명품 소비처럼 ‘부의 신호’를 기반으로 한 시장에서는 이런 심리 변화가 더욱 빠르게 나타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 5월 세계 경제 전망에서 '역자산효과와 금융 불안 및 부채 위기'를 세계 경제의 주요 하방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소비자의 우선순위가 '소유'에서 '경험'과 '가치'로 전환됐다는 의견도 있다. 물질적 재화 축적보다 여행, 건강 등 경험에 투자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유엔세계관광기구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제 관광은 전년 동기 대비 5% 증가하며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매켄지는 '2025 럭셔리 현황' 보고서에서 "고객들은 단순히 명품을 넘어 명품 '경험'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궈차오'의 부상중국 소비자가 견인한 글로벌 명품 시장의 두 자릿수 성장 시대가 끝났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 경제의 구조적 둔화와 '궈차오(?潮·자국 브랜드 선호 및 국가적 자부심)'라는 강력한 문화적 변화가 맞물리면서 시장의 지형이 재편되고 있다. 이는 주기적인 경기 침체가 아닌 구조적인 변화라는 지적이다.
베인앤컴퍼니는 6월 보고서를 통해 올해 중국 내 명품 판매가 정체 혹은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전 세계 명품 시장에서 중국 소비 비중도 팬데믹 시기 고점(약 33%) 대비 약 22% 수준으로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명품 시장 전체가 올해 2%에서 5% 사이의 역성장을 기록할 수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제기했다.
케링 그룹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은 지난해 실적 보고에서 "중국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고, 젊은 층의 높은 실업률이 소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중국발 실적 부진을 밝혔다.
중국에서 '궈차오'의 부상은 단순한 애국심 마케팅을 넘어선다는 분석이다. 서구의 로고가 주는 지위 상징보다 자국의 디자인, 문화적 연관성 그리고 가치를 우선시할 만큼 자신감을 갖게 된 중국 소비자의 변화를 의미한다. 중국 소비자들이 해외여행 및 면세 경로로 눈을 돌리면서 중국 내수 시장의 매력도 감소하고 있다. 작년 중국 하이난 면세쇼핑 매출은 전년 대비 29% 감소했다.캐즘 현상의 심화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은 전형적인 ‘캐즘(수요 단절)’ 현상에 빠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기술 혁신 초기에 제품을 받아들이는 얼리어답터에게서 보다 실용적이고 신중한 ‘초기 다수’ 소비층으로 시장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수요가 정체되는 현상을 뜻한다.
이른바 주류 소비자들은 여전히 전기차 구매에 신중하다. 차량 가격이 높고, 충전 인프라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으며, 정부 보조금 축소나 폐지로 가격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기 둔화와 금리 불확실성까지 겹치며 소비 심리가 한층 위축된 상황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글로벌 전기차 전망 2025'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는 2,00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시장 성장률은 지역별로 큰 편차를 보일 전망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보조금 축소 등으로 성장세가 둔화한 반면, 중국은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 소비자들의 전기차 선호도 하락도 감지된다. 미국자동차협회(AAA)의 2025년 조사에서 "다음 차로 전기차를 고려하겠다"는 응답은 16%로 201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은 지난 5월 전기차 전망 발표에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전기차는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성장 궤도를 유지하고 있다"면서도 "유럽과 미국에서 전기차 보급이 중국보다 느린 이유 중 하나는 가격 격차"라고 지적했다.
관련 시장의 반등 가능성도 있다. 미·중 무역 갈등 해소나 미국이 EU 및 동맹국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철회할 경우에 소비 심리와 기업 수익성은 빠르게 개선될 수 있다.
중국의 공격적인 부양책도 명품 시장을 살릴 수 있다. 중국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되살리는 등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시행할 경우 수요가 다시 늘어날 전망이다. 전기차에선 기술적 돌파구도 필요하다. 배터리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전기차 비용이 급격히 하락하면 '캐즘'을 뛰어넘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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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