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서촌기행 벽수산장 편'에서는 집 주인 친일파 윤덕영을 소개했다. 윤덕영의 아내 김복수(1872~1950)도 친일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김복수는 애국금차회 회장이었다. 금차(金釵)는 금비녀,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는 일제 말 태평양 전쟁에서 전쟁 물자를 지원하기 위한 금비녀 헌납 운동을 전개한 단체다. 부인들은 전쟁에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금비녀라도 뽑아 일본군을 지원하자는 운동이었다. 여성들에게 금비녀는 개인 재산 목록 1위였을 것이다. 가장 정결의 상징인 여성의 머리에 꽂는 비녀를 국방헌금으로 헌납하다니...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 윤덕영의 아내 김복수다. 애국금차회를 결성한 것이 1937년이니 오늘 이야기하는 박노수 미술관의 건립 시기와 맞는다. 아내가 애국금차회를 만드는 시기에 남편 윤덕영은 딸을 위해 집을 지어준 것이다.
애국금차회가 비녀를 모아 일본군에게 전해주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가 있다. 역시 친일 논란을 빚는 김은호가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려 국가에 헌납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을 보면 애국금차회 임원으로 보이는 부인 두 사람이 일본군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금비녀를 전달하고 있다. 남편을 통해 친일을 뼛속까지 배워온 친일파 거두의 아내답다. 그들은 장안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옥인동에 커다란 프랑스풍 집을 짓고 살면서 일본이 영원하기를 빌었을 것이다. 누구의 강요에 의한 친일이 아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가? 윤덕영과 아내 김복수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딸 윤성섭을 위해 윤덕영은 벽수산장에 필적할만한 아름다운 저택을 지어주었다.
토지대장에는 1938년 윤덕영에서 사위 이름 김덕현으로 등재하고 1939년 5월에 상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덕현은 윤덕영의 사위, 누구나 서촌에 가면 몇 번쯤은 지나치는 곳. '박노수 가옥'으로 불리던 집이 처음에는 사위 이름 '김덕현 가'로 불렸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람한 양옥 건물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붉은 벽돌로 단단하게 지어 서양식 건물이라 생각하지만 단정하기는 이르다. 고개를 들어 지붕을 보면 서까래가 받치고 있다.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면 1층에는 온돌방·마루·응접실 등이 있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들어서면 복도 옆 마루방 구조로 만들어져 일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내부에는 또 벽난로가 3개나 설치되어 있다 그뿐인가. 라디에이터도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이 집은 서양식 가옥이구나 생각이 든다. 종합해 보면 건축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운 건축이다. 서양식, 일식, 한식, 창을 보면 중국식.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좋게 얘기하면 여러 나라들의 좋은 점을 두루 갖춘 절충형 양식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며 집을 지은 사람은 누굴까?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다. 박길룡은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 공대 전신)을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기사를 거쳐 건축사무실을 차리고 조선인 민간 프로젝트를 도맡아 했다. 화신백화점,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경성제대 본관(현 서울문리대) 등을 설계한 건축가로 일제강점기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다. 1930년대 경성에서 근대건축 양식을 구사할 수 있는 건축가는 박길룡이 거의 유일했는데 돈 많은 윤덕영이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박길룡에게 설계를 맡긴 것이다. 이렇게 윤덕영은 딸을 위해 각 나라 건축의 장점만을 모은 집을 지어줬다. 벽수산장은 프랑스식, 자신이 거주하던 집과 첩이 생활한 집은 한옥, 딸을 위해서는 절충식 저택을 지었다.
현관문 앞에 여의륜(如意輪)이라는 김정희 글씨의 현판이 있었는데 며칠 전에 가보니 보이지 않는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보존을 위해 수장고에 두었다고 얘기한다. 여의륜은 불경에서 나오는 말로 직역하면 '바라는 뜻이 바퀴처럼 잘 굴러가라'는 뜻. 그러니 이 집에 살면서 뜻하는 대로 모든 일에 만사형통하라는 의미다. 친일파라도 딸 사랑은 지극한 것이다. 이 집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윤덕영이 딸을 위해 1938년에 건립했지만 벽수산장처럼 광복 후 수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가 1973년 남정(藍丁) 박노수(朴魯壽, 1927~2013) 화백이 구입해 2013년 2월 별세할 때까지 거주해 딱 40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박노수는 누구인가?
강한 색채와 도전적인 구도로 동양화의 화풍을 보여준 화가다. 1927년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태어나 18세에 상경해서 같은 서촌에서 터 잡고 살던 청전 이상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두 사람에게는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다. 박노수는 은사 이상범에게 그림의 이치를 물었다. 그림에서 제일 신경 써야 할 요소가 무어냐고 물은 것이다.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은 무서운 얼굴로 한동안 침묵하다가 "여운이 있어야 하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여운이라는 것은 화면에 공간을 도입하는 여백을 통해서 완성된다. 화면에 무언가 자꾸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여백이 있어야 그림에 생동감을 주는데, 그것은 작가의 정신으로 채우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다. 우리 삶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는 청전 이상범에게 그림과 작가 정신을 배웠다. 이상범의 화숙에서 먹고 자면서 도제식 교육을 받다가 인왕산 자락이 너무 맘에 들어 아예 둥지를 틀었다.
박노수는 이듬해 돌연 서울대 미술부 회화1과(동양화과)에 입학했다. 청전과 다른 길을 걸어간 것이다. 서울대에서 당시 우리나라 화단을 이끌던 박문원, 김용준 등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1세대 한국 화가다. 박노수는 절제된 색채와 간결한 선묘로 우리 미술의 맥을 이으면서도 현대적으로 해석해 독자적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1955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 작품 〈선소운(仙簫韻)〉을 출품하여, 수묵채색화로는 첫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종횡무진으로 화단에서 활약하던 중 2003년 1월에 뇌수종으로 쓰러져 10년 동안 세브란스 병원에서 투병 후 2013년 세상을 떠났다.
박노수 가옥에 들어서면 볼거리가 참 많다. 특히 그의 집에는 수석이 많다. 박노수 화백이 전국을 돌며 모은 것들이다. 집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당 건너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장쾌하게 서울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도 멋진데 윤덕영의 딸이 살았던 시대, 아니 그 이전 조선 시대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졌을까?
박노수는 집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 옛 가구, 골동품과 고미술 등 1천여 점을 종로구에 내놓아 지금은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 되었다. 1991년 가옥의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친일파 윤덕영 딸의 집으로만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아쉬웠을 것인가? 건물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박노수 화백의 결단이 없었다면 이 집도 친일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큰 결단을 한 박노수 화백과 그 일가에 경의를 표한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