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커머스 공세에 떠밀려 사양 산업으로 치부되던 오프라인 유통이 되살아나고 있다. 낮은 가격보다 경험, 빠른 구매보다 머무는 즐거움을 중시하는 소비 트렌드에 맞춰 세일 경쟁 대신 콘텐츠를 무기로 진화에 성공한 쇼핑몰과 백화점의 실적이 다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 용산의 아이파크몰이 대표적 사례다. 23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아이파크몰은 캐릭터, 피규어, 게임, 굿즈 등 이른바 ‘덕후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워 2021년 이후 매년 사상 최대 매출을 갈아치우고 있다. 도파민 스테이션과 가챠존, 루프톱 스포츠 구장 등 마니아층을 겨냥한 체험 공간으로 소비자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할인 대신 콘텐츠’라는 전략이 새로운 소비심리를 정확히 겨냥했다.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타워는 호텔, 전망대, 면세점, 몰을 한데 묶어 외국인 관광객에게 ‘K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쇼핑과 관광을 하나로 합치자 과거 궁궐, 명동만 찾던 외국인들이 잠실로 동선을 확대해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잠실을 관광명소로 만들겠다”고 한 롯데 창업주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꿈이 비로소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실내 정원·레저파크 품은 쇼핑몰…확 바뀐 경쟁 패러다임
"온라인 이기려면 체류시간 늘려야…건물 크기 아닌 스토리가 경쟁력"더현대서울은 ‘공원 같은 백화점’으로 불린다. 판매보다 머무는 경험을 설계한 공간형 백화점의 원형이 됐다는 평가다. 천장을 걷어 올려 조성한 실내 정원 ‘사운즈 포레스트’는 백화점이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니라 여유롭게 쉬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신세계의 복합쇼핑몰 스타필드 하남은 ‘레저의 유통화’를 실현해 성공을 거둔 사례다. 키즈 파크, 스포츠몬스터, 아쿠아필드 같은 체험형 시설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핵심 콘텐츠다. 주말이면 1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몰려와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떠난다.
인천 영종도의 인스파이어는 숙박시설에 초대형 몰을 결합한 신개념 복합 문화 공간이다. 1만5000석 규모의 초대형 아레나를 기반으로 K팝뿐 아니라 글로벌 아티스트의 굵직한 공연을 잇달아 유치해 ‘문화 성지’로 올라섰다.
이들의 성공 방정식은 명확하다. 오프라인에만 있는 희소성 높은 콘텐츠, 방문객 체류 시간의 극대화, 마니아와 외국인 등 지갑을 여는 타깃 소비자 위주의 설계다. 이런 요소들이 맞물려 재방문율이 상승하고 객단가(1인당 매출)가 껑충 뛰었다. 반면 이렇다 할 콘텐츠 없이 가격 할인 위주의 마케팅을 고집한 유통사들은 줄줄이 퇴출 위기를 맞고 있다.
오프라인 유통의 새로운 생존 전략은 도시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복합 쇼핑몰의 흡인력은 상권을 넘어 생활권까지 재편한다. 과거 외국인 관광객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서울 잠실, 여의도는 요즘 관광 성지로 떠올랐다. 대형몰 인근의 전통 시장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 망한다”던 주변 상인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정준호 롯데백화점 사장은 “오프라인 유통업체는 이제 판매 전략보다 머무는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며 “고객들의 시간 점유율을 높이고, 놀고 체험하는 공간을 키우되 판매는 뒤에 숨기는 전략이 e커머스의 공세를 이길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상품 경쟁이 아니라 시간 경쟁, 가격 싸움이 아니라 경험(콘텐츠) 싸움으로 유통의 질서가 바뀌고 있다”며 “오프라인의 미래는 더 이상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성되는 이야기의 깊이에 달려 있다”고 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