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6일, 파리패션위크에서 공개된 샤넬의 2026 봄·여름(S/W) 컬렉션은 전 세계 패션업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테가 베네타를 이끌던 마티유 블라지가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선보인 첫 데뷔 쇼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블랙핑크 제니, 켄달 제너, 틸다 스윈턴 등 세계적인 셀럽들이 참석한 이날 런웨이에서 마티유 블라지는 샤넬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작업을 선보였다. 가브리엘 샤넬이 추구했던 남성성과 여성성의 균형을 재해석하고, 트위드, 저지, 실크 등 샤넬의 핵심 소재를 새롭게 다듬어 표현했다.
샤넬은 언제나 창립자 가브리엘 코코 샤넬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디자이너를 통해 진화해왔다. 마티유 블라지 이전에는 칼 라거펠트가 있었고, 그는 샤넬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부활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1910년 파리에서 시작, 여성 해방의 역사를 쓰다
샤넬의 시작은 1910년 파리 캉봉가 21번지의 작은 모자 부티크였다.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은 여성들을 코르셋에서 해방하고,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현대적 스타일을 제시하며 패션계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188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수녀원에서 자랐다. ‘코코’라는 애칭은 그녀가 패션계에 뛰어들기 전 카페 무대에서 부르던 노래에서 유래됐다고 알려져 있다.
일찍이 예술계 인사들을 사로잡는 남다른 패션으로 주목받은 가브리엘 샤넬은 이어서 도빌에 샤넬 부티크 매장을 열었다. 샤넬 부티크가 선보인 패션은 20세기 초 남성 속옷에 사용되던 저지 소재를 여성복에 활용한 파격이었다. 당시 여타 패션 브랜드와는 차별화된 급진적인 스타일로 평가받았다.
1915년에는 비아리츠에 첫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며, ‘기성복을 파는 브랜드’를 넘어 ‘스타일을 창조하는 하우스’로 도약했다.
1920년대 샤넬은 영국 시골의 농부와 양치기들이 입던 트위드 원단을 최초로 여성복에 사용했다. 100년이 흐른 현재에도 샤넬이 만들어낸 트위드 재킷은 현대 여성의 옷장 필수 아이템으로 거론될 만큼 위대한 유산이 됐다.
샤넬이 디자인한 트위드 아이템은 재클린 케네디, 그레이스 켈리 등 20세기 유명 인사의 사랑을 받았다. 이 외에도 2.55 플랩 백, N°5 향수, 투톤 펌프스, 세일러 셔츠 등 불후의 패션 아이템을 선보이며 샤넬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다음 세대에 영감을 주는 패션 하우스로 거듭났다.1983년, 혜성처럼 등장한 칼 라거펠트
1971년 1월 10일, 87세의 나이로 가브리엘 샤넬이 세상을 떠났다. 창립자의 죽음은 거대한 공백을 남겼다. 패션 하우스는 샤넬 정신을 이어받을 새로운 상징적 인물이 절실했다.
12년이 지난 1983년, 칼 라거펠트가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했다. 발망, 파투, 끌로에 등 유수의 패션 하우스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가브리엘 샤넬처럼 현대 여성을 위한 패션을 변화시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칼 라거펠트는 가브리엘 샤넬의 유산을 재해석한 컬렉션을 꾸준히 선보이며 브랜드의 옛 영광을 되찾게 한 인물이다. 검은 슈트, 검은 선글라스, 하얀 포니테일, 손가락 없는 장갑이라는 상징적인 아이템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칼 라거펠트는 코코 샤넬의 신화와 유산을 계속 살아 숨 쉬게 했다.비잔틴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1996 골드 재킷
샤넬 제국을 부활시킨 칼 라거펠트는 1996년 골드 재킷에 비잔틴 주얼리·장식 미학을 투영하였고, 2011 프리폴 컬렉션을 통해 이를 한층 확장했다.
그가 디자인한 골드 재킷은 그의 재해석 능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브리엘 샤넬이 즐겼던 비잔틴 양식의 주얼리 및 의상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새해 전야 공연 리허설에서 레이디 가가는 같은 디자인의 슈트를 착용해 화제를 모았다. 이는 칼 라거펠트의 디자인이 단순한 패션을 넘어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비잔틴 양식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지명인 '비잔티온’에서 유래됐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요지에서 태동한 양식으로, 금사·모자이크·보석 세팅 등 장식과 황금 컬러가 핵심이다.
칼 라거펠트는 파리에서 공개한 특별 공방 컬렉션 ‘2011 프리 폴 메티에르 다르’에서 비잔틴 양식에서 영감받은 패션을 한 번 더 선보였다. 해당 컬렉션은 육중한 주얼리, 풍성한 트위드, 시어한 실크, 금빛 광택감이 특징이었다.
메티에르 다르는 공식 컬렉션과는 별개로 탁월한 장인들의 전문 기술을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별개의 컬렉션이다.
또한 칼 라거펠트는 샤넬의 상징적 모티프인 진주, 시그니처 CC 로고를 받아들이면서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으로 샤넬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시그니처 트위드 원단, 금색 체인, 퀼팅 가죽을 각 현대 컬렉션에 통합했다.
칼 라거펠트가 남긴 유산, 패션 예술이 되다칼 라거펠트는 샤넬의 컬렉션 디자인부터 광고 캠페인 촬영, 매장 디스플레이 배치까지 관여했다. 2000년 파리에서 크루즈 컬렉션 패션쇼를 처음 선보이고, 샤넬 하우스의 정례화된 이벤트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2019년 2월 19일 세상을 떠난 후에도 칼 라거펠트가 남긴 창조적 유산은 패션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의 코드를 독특한 언어로 재해석하는 그의 능력은 샤넬 후계자인 버지니 비아르, 마티유 블라지 뿐만 아니라 알레산드로 미켈레, 에디 슬리먼, 존 갈리아노 등 오늘날 유명한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샤넬을 이끈 칼 라거펠트는 가브리엘 샤넬의 디자인을 새로운 소재와 감각으로 재탄생시키며 샤넬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그가 비잔틴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탄생시킨 골드 재킷은 패션이 의복을 넘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다. 현재 해당 골드 재킷은 이랜드뮤지엄에서 소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