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 각국이 미래 노동시장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선 격차 해소와 노사 간 합의체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AI 도입이 가속화하면서 노동·고용 불균형과 계층 간 격차가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특히 전문가들은 AI 기술이 어느 정도 파급력을 미칠지, 어떤 집단이 혜택을 누릴지조차 불분명한 만큼 사회 전체의 방향성을 재점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는 창립 60주년을 맞아 23일 고려대 서울 캠퍼스에서 ‘전환 시대의 새로운 노동 이슈’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AI를 중심으로 급변하는 산업·고용 환경 속에서 정책적 대응과 사회적 균형점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을 비롯해 국내외 석학들이 참석해 각국의 노동시장 전망과 대응 전략을 공유했다. AI 대전환, 불평등 대응 서둘러야이날 발제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불평등’과 ‘격차’였다. 전문가들은 AI 기술 자체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노동의 가치와 소득 구조를 재편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도 이날 축사에서 “현재 글로벌 노동시장은 통상 압력, 플랫폼 경제 확산뿐 아니라 AI·디지털 혁신 등 전례 없는 속도의 변화로 노동자의 고용 불안정성과 계층 간 격차가 커지고 있다”며 “대전환 자체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노동학 전문가인 파울라 부스 미국 럿거스대 교수는 AI 버블론을 제기한 외신 기사를 인용하며 발표를 시작했다. AI 시대를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며 운을 뗀 파울라 교수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 경기침체에 들어설 거라고 봤는데 최근 AI 투자가 미국 경제를 부양하고 있다"면서도 "소수 기술 기업 중심의 자본 집중이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아마존·알파벳(구글 모회사)·메타·마이크로소프트(MS) 등 4대 빅테크의 AI 투자가 2025년 연간 500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며 “극소수 기업들의 결정만으로 노동 시장이 형성된다면 상위층 자본수익은 더 커지고, 중·하위층은 외면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AI 개발에 각국 정부와 기업이 사활을 거는 가운데, 불평등 구조 심화에 대한 우려는 실제 커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4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AI는 고소득·고숙련 근로자에 한해선 보완재로 작용해 노동소득이 더 빠르게 증가할 가능성이 큰 반면, 저숙련·저임금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소득 정체와 대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또한 AI에 의한 생산 이익이 충분히 확산되지 않으면 노동소득의 분배가 상위 10%에 집중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파울라 교수는 “미국 고용시장은 2020년 이후 퇴사율이 낮아지는 등 얼어붙어 있어 AI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지고 있다”며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불안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해법은 합의...AI 시대, '사람 중심 전환'이 관건AI가 불러올 노동시장 내 불평등과 격차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해당사자 간 합의 구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AI가 노동시장 전반을 재편하는 속도에 비해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숀 시아 싱가포르 전국노동조합의회(NTUC) 전략 부국장은 노사정 간 협력을 강조했다. 싱가포르는 AI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노사정 협의체가 잘 갖춰진 나라로 꼽힌다. 숀 부국장은 “AI는 2030년까지 싱가포르 핵심 기술 인력의 36%를 바꿔놓을 것”이라며 “정부·노동계·경영계가 삼자주의 체계를 통해 공동 대응 중”이라고 소개했다. 삼자주의 체계에는 인적자원부(MOM), 전국사용자연합(SNEF), 전국노동조합회의(NTUC)가 포함된다. 싱가포르 기업훈련위원회(CTC)는 고용주와 근로자 대표가 함께 직무 재설계와 기술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미카엘 한손 스웨덴 웁살라대 법학과 교수는 노사 간 자율적인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했다. 스웨덴 노동시장은 노조 가입률이 약 70%에 달하며 법적 규제 대신 노사 모두 전통적으로 단체협약에 강하게 의존하는 구조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AI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선 기술적 요소를 간과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 부국장은 “AI 시대의 노동정책을 설계할 때는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도 관리해야 한다”며 "과거 컴퓨터 등과 달리 AI는 ‘블랙박스’처럼 내부 원리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영총 기자 young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