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월세 더 받으려면…" 집주인 유혹한 '무서운 꿀팁' [글로벌 머니 X파일]

입력 2025-10-24 06:50
수정 2025-10-24 08:05


미국 중심으로 인공지능(AI) 기반 임대료 책정 알고리즘이 주택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AI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임대 시장의 자연스러운 가격 조정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종의 '디지털 카르텔'로 작동해 주거비 인플레이션 고착화의 핵심 요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뉴욕, AI 기반 임대료 담합 금지24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뉴욕주가 지난 16일 미국에서 최초로 주 차원에서 임대료 책정 알고리즘을 사용한 가격 공모 행위를 전면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달 초 미국 전역에서 진행 중 세입자 집단소송에서는 미국 최대 임대 관리사 그레이스타를 포함한 27개 대형 임대관리 회사가 총 1억 4100만 달러 규모의 배상에 잠정 합의했다.

최근 논란이 된 '임대료 책정 알고리즘'의 대표 기업은 미국의 부동산 소프트웨어 기업 리얼페이지다. 리얼페이지가 제공하는 AI 수익 관리(AIRM) 소프트웨어는 단순한 효율성 도구를 넘어, 경쟁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교하게 설계됐다는 의혹을 받는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는 미국 다가구 아파트 4채 중 1채(25%)가 이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알고리즘의 핵심 동력은 경쟁사로부터 입수한 '비공개·민감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미국 법무부(DOJ)가 지난해 법원에 제출한 소장에 따르면, 리얼페이지의 소프트웨어는 고객사(임대인)들로부터 매일 현재 및 미래의 공실률, 실제 체결된 임대료, 갱신 계약률, 잠재 세입자의 방문 횟수, 개별 유닛의 임대 가능 날짜 등 통상적으로 경쟁사 간에 공유되지 않는 내부 영업 정보를 전송받는다.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리얼페이지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제소했다.

이런 정보의 집중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개별 임대인은 자신의 가격 결정이 경쟁사의 행동과 어떻게 연동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참여자가 경쟁 대신 가격 인상에 동참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다는 분석이다.
“솔직히 AI가 임대로 상승세 주도"해당 알고리즘은 이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단순히 시장 평균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수익 극대화'를 위한 공격적인 가격 전략을 추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쟁사의 가격 인상 움직임을 포착했을 때 '오늘 10달러를 인상하는 대신 50달러를 인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미국 탐사보도 매체 프로퍼블리카에 따르면 리얼페이지의 부사장이었던 앤드루 보웬은 임대료가 한 해 동안 약 14.5% 급등한 시점에 회사 홍보 영상에서 “솔직히 (이 소프트웨어가) 그 상승세를 주도하고 있다고 본다”고 발언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가격 하락을 인위적으로 방어하는 기능이라는 지적이다. 일반적으로 임대 시장의 수요가 줄어들면 임대인들은 공실을 줄이기 위해 임대료를 낮추거나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경쟁한다. 그러나 리얼페이지의 알고리즘은 이러한 시장의 자연스러운 조정 기능을 마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법무부가 인용한 리얼페이지의 내부 문건에 따르면, 이 소프트웨어는 시장 침체기에 임대료를 대폭 낮추려는 임대인의 본능을 억제하고, 일정 수준의 공실을 감수하더라도 가격을 유지하도록 권고한다. 이는 시장이 하락할 때 '바닥을 향한 경쟁'을 막으려는 리얼페이지의 목표를 충실히 수행한다.

탐사보도 매체 프로퍼블리카가 입수한 자료에서도 리얼페이지는 고객에게 '몇 개 유닛이 빈 채로 남더라도 임대료를 더 올려라.', '세입자와 협상하지 말라'는 식으로 의도적 공실 감수와 할인 억제를 부추겼다. 해당 알고리즘 개발에 참여했던 한 개발자는 "임대 담당 직원들은 (세입자에게) 공감을 너무 많이 한다"며 사람 대신 기계가 임대료를 결정해 보다 단호하게 임대료 인상을 관철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알고리즘은 공급 조절을 통한 가격 방어 전략까지 권고했다. 특정 시기에 임대 계약 만료가 몰려 공급이 급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표준적인 12개월 계약 대신 13개월 또는 14개월 계약을 추천하는 등 임대 기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공급을 분산시키고 가격 하방 압력을 완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주 법무장관 닉 브라운은 올해 관련 소송 제기 성명에서 "리얼페이지의 불공정한 관행은 세입자들을 속이고 가족들을 안정적인 주거에서 몰아내고 있다"며 "리얼페이지의 소프트웨어는 임대인들에게 임대료를 상승시키는 경향이 있는 공유된 논리를 제공한다"고 비판했다. 플랫폼을 통해 담합 효과 극대화리얼페이지를 둘러싼 법정 다툼의 핵심은 ‘허브-앤-스포크(Hub-and-Spoke)’ 담합 구조에 있다. 전통적인 담합은 경쟁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가격을 짜는 ‘수평적 합의’ 방식이었다. 반면 허브-앤-스포크 방식은 경쟁사들이 서로 직접 연락하지 않고, 제3의 중개자(허브)를 통해 가격 정보를 주고받으며 사실상 담합 효과를 내는 형태다. 리얼페이지가 바로 이 ‘허브’ 역할을 했다는 게 소송의 쟁점이다.

DOJ는 리얼페이지가 '허브'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임대인들이 리얼페이지라는 중앙 플랫폼에 각자의 비공개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경쟁사의 데이터가 반영된 가격 추천을 받는 행위 자체가 '담합에 대한 합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메릭 갈런드 전 미국 법무장관은 작년 소송 제기 당시 성명에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도 담합은 담합이다"라며 "기계에 법을 어기도록 훈련하는 건 여전히 불법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100여 년 된 담합 금지법(셔먼법)을 AI 시대에도 엄격히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디지털 시대 담합 규제의 새로운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예전에는 기업들이 한자리에 모여 가격을 짜는 ‘연기 자욱한 방(smoke-filled room)’ 같은 직접 증거가 있어야 담합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와 상황이 다르다. 이제 기업들은 ‘공유된 알고리즘’에 스스로 민감한 데이터를 입력한다. 이 알고리즘은 여러 기업의 가격을 동시에 끌어올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기업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알고리즘이 제시한 결과를 그대로 따른다.



이런 행동이 새로운 형태의 ‘합의’, 즉 담합으로 볼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법원이 이 문제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부동산뿐 아니라 항공, 호텔, 차량 공유 등 알고리즘이 가격을 결정하는 모든 산업에 파급력이 큰 판례가 될 전망이다.캐나다 강경 대응, 유럽도 조사 중캐나다도 미국과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작년 12월 리얼페이지와 캐나다의 대형 주택임대 기업들(캡리트, 트라이콘 등)을 상대로 가격 담합 의혹 집단소송이 제기됐다. 올 2월에는 캐나다 경쟁 당국이 AI 기반 가격 책정 알고리즘의 불법적 사용 가능성에 대한 공식 조사를 시작했다 밝혔다.

EU 집행위원회도 "비록 명시적 담합 의사가 없어도, 알고리즘을 통한 협조 행위도 위법"이라는 원칙을 여러 차례 밝혔다. 알고리즘이 경쟁사 정보를 실시간 공유·반영해 가격을 동조화하면 '공동행위'로 제재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 7월 EU 집행위원회의 린지 맥컬럼 반독점국 부국장은 "현재 여러 건의 알고리즘 가격담합 사안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영국 경쟁시장청(CMA) 역시 미국 사례를 주시하고 있다. 영국 CMA의 사라 카델 청장은 지난 9월 알고리즘 가격 문제에 대해 "관심과 우려의 영역"이며 "미국 사건을 지켜보며 학습하고 있다"고 밝혔다.Fed의 통화 정책 왜곡?알고리즘 카르텔 논란은 거시 경제의 가장 큰 변수인 인플레이션과 직결된다.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을 교란하는 심각한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장 지표와 공식 통계의 괴리는 단순한 통계적 착시를 넘어, 알고리즘이 개입된 구조적 왜곡의 결과일 수 있다.

최근 미국 임대 시장은 둔화하고 있다. 9월 기준 전국 아파트 공실률은 7.1%로 치솟으며 2017년 해당 통계 집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임대인들이 제공하는 인센티브(컨세션) 비율도 9월 기준 37.3%에 달하며 수요 감소세를 보였다. .

하지만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에서 가장 큰 비중(35.434%)을 차지하는 주거비 항목은 여전히 전년 동기 대비 3.6%(2025년 8월) 상승하며 인플레이션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런 상반된 신호는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결정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시장 임대료와 공식 CPI 주거비 지표 간의 괴리는 임대차 시장의 구조적 특성과 데이터 수집 방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로렌스 볼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와 고경웅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가 전미경제연구소(NBER)를 통해 8월에 내놓은 논문 'Market Rents and CPI Shelter Inflation'은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주거비 지표가 시장 임대료의 변동에 후행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장기 계약의 관성이다. 미국 임대차 시장의 약 60%는 12개월 단위의 장기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규 계약 임대료가 변동하더라도 대다수 기존 세입자의 임대료는 계약 만료 전까지 고정돼 시장 변화의 반영 속도를 늦춘다.

두 번째는 기존 임차인에 대한 임대료 조정 관행이다. 집주인들은 우량 임차인을 유지하고 공실 발생에 따른 비용과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해 시장 임대료 인상분을 100% 전가하기보다는 인상 폭을 완화해주는 경향이 있다. 연구진은 집주인이 시장 임대료 상승분의 약 21%만을 기존 임차인의 갱신 계약에 반영한다고 추정했다. 예를 들어, 지난 1년간 시장 임대료가 10% 올랐다면, 기존 임차인의 임대료는 평균적으로 2.1%만 인상된다는 의미다.

세 번째는 통계 산출 방식의 시차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은 CPI 주거비 지수를 산출할 때 표본 가구의 현재 임대료를 6개월 전 임대료와 비교하여 변동률을 측정한다. 통계 자체에 최소 6개월의 시차가 생긴다. 문제는 리얼페이지 등 가격 책정 알고리즘이 시장의 자연스러운 조정 과정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원래 임대 시장은 수요가 줄면 일정 시차를 두고 임대료가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이런 하락 압력을 막는다. 시장이 식을 때 오히려 임대료 인하를 미루고, 일정 수준의 공실을 감수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임대료는 내려갈 때 덜 내려가고, 소비자물가지수(CPI)에서 주거비 항목의 하락 속도도 늦어진다. 알고리즘이 사실상 ‘브레이크’ 역할을 하며 시장의 가격 조정 기능을 마비시키는 셈이다. 이런 구조는 결과적으로 ‘렌트플레이션(고착된 임대료 인플레이션)’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되는 주거비는 경제 전반에 심각한 부정적 파급 효과를 미친다. 가장 큰 위험은 통화정책의 판단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은 소비자물가지수(CPI) 같은 공식 물가 지표를 근거로 금리를 조정한다.

그런데 가격 책정 알고리즘이 주거비 하락을 인위적으로 막아 CPI를 실제보다 높게 유지한다면, 중앙은행은 물가가 여전히 높은 것으로 오인해 긴축 정책을 불필요하게 오래 끌 수 있다. 반대로 금리를 섣불리 내렸다가 주거비 인플레이션이 다시 치솟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정책 딜레마’는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키고, 궁극적으로 경기 침체를 부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비 위축 또한 불가피하다. 주거비는 가계 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임대료 상승은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줄여 내수 경기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미국 최대의 온라인 부동산 플랫폼 질로우에 따르면 9월 기준 미국 임차 가구의 임대료 부담률은 중위 소득의 28.4%에 달한다.
한국은 '알고리즘 카르텔'의 안전지대인가글로벌 시장을 휩쓸고 있는 '알고리즘 카르텔' 논란에서 한국의 주거 시장은 비교적 잠잠한 모습이다. 이는 한국 임대차 시장이 가진 고유한 구조적 특성 덕분이다. 현재 한국 시장에서 리얼페이지와 같은 정교한 임대료 책정 알고리즘이 확산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전세 제도. 한국 임대차 시장의 40% 이상은 전세 계약이 차지한다. 전세는 매월 현금흐름이 발생하는 월세와 달리, 계약 시점에 거액의 보증금을 주고받는 방식이다. 리얼페이지의 알고리즘은 월 단위 임대료 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됐다. 현금흐름이 없는 전세 시장에는 직접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파편화된 개인 임대인 중심의 시장 구조도 한몫한다. 한국의 주택 임대 사업은 소수의 기업이 아닌, 다수의 소규모 개인 임대인에 의해 주도한다. 이들은 전문적인 자산 관리보다는 안정적인 임대 수입이나 시세 차익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리얼페이지와 같은 B2B 솔루션을 도입할 유인이 상대적으로 낮다.

그러나 월세 비중이 커지면 알고리즘이 파고들 시장도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몇 년간 반복된 전세 사기 리스크와 금리 변동성 증가는 임차인과 임대인 모두에게 전세의 매력을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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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