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고강도 상호관세 카드를 꺼내며 글로벌 증시를 패닉으로 몰아간 지난 4월만 해도 한국은 외국인 매도 1위국이었다. 외국인은 이 기간 한국 주식을 100억달러(약 14조3000억원)어치 팔아치웠다. 나머지 주요 신흥국의 외국인 매도 물량을 합친 액수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외국인 평가가 달라진 건 하반기에 들어서면서다. 특히 9월 이후엔 신흥국 증시 가운데 가장 많은 92억달러어치를 사들였다. 같은 기간 아시아권에서 순매수에 나선 국가는 한국을 빼면 대만이 유일하다. 대만 순매수 물량이 한국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한국 주식을 ‘사재기’했다.◇매도 1위에서 매수 1위로 반전
극적 반전의 배경에는 반도체가 있다. 외국인은 9월 이후 순매수액 13조원 중 삼성전자 한 종목을 10조원어치 담았다. 외국인 매수세가 유입되며 9월 이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 상승률은 각각 45.9%, 88.1%에 달했다. 국내 대형 반도체업체 기업설명(IR) 담당자는 “작년 말보다 해외 투자자 문의가 20% 이상 늘었다”며 “최근엔 남미와 북유럽, 아프리카 금융회사들도 연락해 온다”고 전했다.
실적 개선이 뚜렷한 정보기술(IT)과 조선·방위산업·원자력발전 관련주도 외국인 러브콜을 받고 있다. 외국인은 9월 이후 두산에너빌리티(6720억원), 삼성전기(4570억원), 한국전력(4360억원) 등을 많이 매수했다. LG화학, 현대로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HD현대중공업도 3000억원어치 이상 순매수했다. 같은 기간 에이피알, CJ 등 K컬처 관련주도 1000억원어치 넘게 담았다. 프랭클린템플턴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 증시가 신흥시장 강세를 주도하고 있다”며 “반도체를 비롯해 방산, 조선, K뷰티, K컬처, 의료관광 등 다각화한 성장동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유럽 투자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 영국 국적 투자자가 국내 주식을 2조1910억원, 아일랜드 투자자가 1조3230억원어치 순매수했다. 전통적으로 국내 주식을 가장 많이 사들이던 미국 투자자는 순매수액 9440억원으로 3위로 밀렸다. 정지태 한국투자증권 국제영업부 상무는 “유럽계 헤지펀드들이 고평가된 미국 빅테크(대형 기술주)를 일부 덜어낸 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싸다고 판단한 한국 증시로 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글로벌 투자사 “K반도체주 싸다”반도체를 중심으로 한국 증시가 급등했지만 상승 여력이 충분하다는 게 증권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내년 순이익 전망치 기준 주가순자산비율(PBR)은 각각 1.43배, 2.25배다. 세계 3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3.1배) 대비 주가 매력이 높다는 얘기다. 삼성전자 PBR은 부실 기업인 인텔(1.5배)보다도 낮다.
주가수익비율(PER) 기준으로도 마찬가지다. SK하이닉스의 내년 순이익 전망치 기준 PER은 8.39배로, 삼성전자(12.74배), 마이크론(12.1배) 등 주요 메모리사 중 가장 낮았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마이크론이 미국 시장 프리미엄을 받는 점을 감안해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도 K반도체주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씨티그룹은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13만3000원에서 14만5000원으로, SK하이닉스 목표주가는 48만원에서 64만원으로 상향했다.
마이크론이 중국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철수한 것도 K반도체엔 호재라는 평가다. 데이터센터 서버에 들어가는 고부가가치 칩을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은 마이크론을 제외하면 사실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이다. 정 상무는 “뮤추얼 펀드와 연기금, 국부펀드 등 방향 전환이 느린 장기 자금이 아직 국내 증시에 많이 유입되지 않은 만큼 외국인이 추가로 들어올 여력이 많다”고 말했다.
전예진/맹진규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