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품 거래시장이 조금씩 활력을 되찾는 분위기다. 불황이 바닥을 찍었다는 인식이 퍼지며 경매시장을 중심으로 한국 화단을 이끈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이 잇따라 출품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초 기대 이하의 낙찰가로 손바뀜됐던 김환기의 회화가 9개월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가운데 이우환, 천경자, 김창열, 우국원 등 탄탄한 수요를 지닌 작가들의 작품이 서울옥션과 케이옥션 경매에서 새 주인을 찾는다.
케이옥션은 오는 29일 서울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에서 10월 경매를 연다. 총 88점, 약 106억원 규모(낮은 추정가 총액)이 출품되는 이번 경매는 국내 미술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들로 출품작 리스트를 꾸렸다. 이 중 김환기의 ‘무제’(추정가 7억 5000만~20억 원)가 눈길을 끈다. 화면 중앙의 푸른 점을 둘러싼 점, 선, 면이 돋보이는 이 회화는 그가 1960~1970년 미국 뉴욕에서 구축한 후기 양식(뉴욕시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무제’는 지난 1월 같은 경매에 나와 7억 8000만원에 거래됐다. 당시 시작가가 9억 5000만원이었지만, 불황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기대보다 낮은 가격에 낙찰됐다. 통상 유명 작품이 유찰되거나 저가 낙찰되면 한동안 시장에 나오지 않는 ‘매물 잠김’ 현상이 나타난다. 작품 가치를 산정할 때 경매 이력과 낙찰가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 그만큼 이 작품이 9개월 만에 다시 경매에 나온 것은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경매사나 소장자 모두 종전 가격을 넘어설 것이란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 엿보인다는 점에서다.
“팔릴 작품은 팔린다”는 인식은 하반기 들어 시장 전반에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지난달 케이옥션 경매에서 이중섭의 ‘소와 아이’, 박수근의 ‘산’이 각각 35억 2000만원, 12억 원에 낙찰된 게 기폭제가 됐다. 상반기 국내 경매에서 10억원이 넘는 낙찰가를 기록한 작품이 단 한 점에 불과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반등이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바닥 다지기 국면을 지났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케이옥션이 김환기를 비롯해 이우환 ‘바람과 함께 S8708-5’(9억~15억원), 박서보 ‘묘법 No. 150218’(4억2000만~6억7000만원), 천경자 ‘자바의 여인’(3억3000만~6억 원), 김창열 ‘물방울 PA83032’(2억5000만~3억5000만원) 등 블루칩 작가들의 주요작을 대거 내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시장이 정상 작동하기만 하면 결과를 확실하게 보장할 만큼 수요층이 탄탄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천경자와 김창열은 각각 서울 부암동 석파정 서울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어 시장 주목도도 높다.
오는 28일 서울 신사동에서 10월 경매(제187회 미술품 경매)를 여는 서울옥션의 선구안도 비슷하다. 총 112점, 약 83억원 규모로 마련한 이번 경매의 하이라이트도 김환기다. 뉴욕 시기 종이에 작업한 푸른색 전면점화, 질서 있게 들어선 색점들이 만들어내는 절제된 패턴과 통일된 색조가 특징인 1973년 작 ‘무제’가 추정가 5억6000만~8억원에 출품됐다. 부친인 백초 우재경 화백의 작품을 오마주한 것으로 2021년 우 화백과의 부자 전시에 선보였던 우국원의 ‘Big Adbenture’(1억8000만~2억5000만원)도 눈길을 끈다.
김창열의 작품도 6점이 나왔다. 반짝이는 물방울의 영롱함이 돋보이는 ‘물방울’(3억2000만~5억원)을 비롯해 1990년대 ‘회귀’(9000만~1억5000만원) 연작 등 작가의 작업세계 전반을 아울렀다. 이 밖에 쿠사마 야요이 ‘Infinity Nets’(별도문의)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백자청화고사인물문병’(3억~5억원) 같은 희소성 높은 도자기 등 고미술 작품들도 새 주인을 찾는다.
케이옥션과 서울옥션의 10월 경매 출품작을 볼 수 있는 프리뷰 전시는 각사의 경매 당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