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미국인 피아니스트 에릭 루(27)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20일(현지시간) 열린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10년 전 이 대회 4위였던 그는 재도전 끝에 결국 쇼팽 콩쿠르 우승자의 타이틀을 얻었다.
2위는 캐나다의 케빈 첸(20), 3위는 중국의 왕쯔퉁(26)이 차지했다. 국적은 다르지만 모두 중국계 피아니스트로, 최근 중국계 연주자들이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조성진과 인연…재도전 끝 ‘우승’
루는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했으며, 2018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했다. 그는 조성진과도 인연이 깊은데,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2015년 4위를 기록했다. 이후 보스턴·런던·시카고·도쿄·상하이 심포니 등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슈베르트·쇼팽·슈만·브람스의 작품이 담긴 두 음반도 발매했다. 그는 이미 콩쿠르 우승자로 명성이 높았지만 쇼팽 콩쿠르에 재도전했다. 본선 3라운드에선 손가락 부상과 감기로 경연 순서를 조정하는 이슈가 있었다. 게다가 쇼팽 콩쿠르가 재도전자에게 더욱 냉정한 평가를 해온 기조도 있었다. 개릭 올슨 심사위원장은 “이번 심사는 ‘예술성’을 주제로 매우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고, 그 결과 최종적으로 훌륭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루는 우승 발표 직후 “정말 꿈이 이뤄진 순간”이라며 “이 영예를 얻게 돼 진심으로 감사하고, 온라인으로 지켜봐준 전 세계 쇼팽 애호가들과 바르샤바 현장 관객들에게도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쇼팽>의 저자 김주영 피아니스트는 “10년 전 4위였던 사람이 다시 나와 우승하려면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루는 테크닉, 소리, 음악성은 물론 쇼팽과 솔직하고 순수하게 마주하는 태도까지 갖춘 연주자”라며 “결국 얼마나 쇼팽과 만나 자신의 영혼(soul)이 나오느냐가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루는 ‘쇼팽 스페셜리스트’ 당타이손의 제자이기도 하다.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 소속으로 이번 대회 심사위원이기도 한 당타이손은 2021년 브루스 리우에 이어 2회 연속 제자 우승자를 배출했다. ◇한국 이혁·이효 형제 ‘화제’이번 대회는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넘쳤다. 이전 결선 진출자가 재도전으로 우승을 차지한 건 이례적이다. 결선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택해 우승한 것도 드문 일이다. 대다수 참가자가 1번을 선택해 우승자도 대부분 1번에서 나왔다. 조성진의 결선곡도 1번이었다. 올해 결선에선 루를 비롯해 네 명이 2번을 택했다. 결선에 진출하진 못했지만 장외 스타도 다수 탄생했다. 한국의 이혁, 이효 형제는 뛰어난 음악성과 유창한 폴란드어 실력으로 현지에서 ‘스타덤’에 올랐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하는 무대에서 보여준 그들의 음악 여정은 결과와 무관하게 빛을 봤다.
5년에 한 번 열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폴란드 바르샤바 현지뿐 아니라 전 세계 클래식 애호가들이 관전한 클래식 축제였다. 결선 마지막 주자였던 일본의 구와하라 시오리 무대는 유튜브 동시 접속자 7만1000명을 돌파했다. 쇼팽 인스티튜트는 “유튜브를 통한 온라인 생중계로 세계 클래식 음악팬들을 결집했고, 역대 최다 뷰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우승자 루는 다음달 21일 한국을 찾는다. 서울 신천동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 참석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한 곡을 협연할 예정이다. ◇중국계 피아니스트 약진올해 쇼팽 콩쿠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중국계 피아니스트들의 선전이다. 1~3위뿐 아니라 공동 4위에 오른 뤼톈야오도 2008년생 중국 피아니스트였다. ‘건반 위의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세계 최고의 피아노 경연 대회에서 1~4위를 중국계 연주자가 휩쓴 것이다.
5개의 특별상 중 3개도 중국인 피아니스트에게 돌아갔다. 3위인 왕쯔퉁이 소나타 최고연주상을 받았고, 뤼톈야오가 협주곡 최고 연주상을 차지했다. 순위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준수한 연주력을 선보인 중국 피아니스트 리톈유는 폴로네이즈 최고연주상을 안았다.
중국계 젊은 연주자들의 부상은 쇼팽 콩쿠르에서만 보이는 양상이 아니다. 지난 6월 열린 미국 밴클라이번 콩쿠르에선 홍콩 출신 아리스토 샴이 우승을 차지했다. 2022년 한국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역대 최연소 우승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대회다. 지난달엔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에서 중국 피아니스트 우이판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독일 뮌헨 ARD 콩쿠르에서 중국 피아니스트 왕리야가 1위를 거머쥐면서 주목을 받았다.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는 “중국은 매우 빠른 속도로 클래식 음악 저변 확대에 나서고 있다”며 “지난 10여 년간 제도적인 뒷받침이나 정책적인 지원 등으로 꾸준히 투자해온 결과가 이제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민선/김수현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