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편제’를 보고 정말 많이 울었거든요. 소리꾼 부녀의 ‘한(恨)’을 제대로 구현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소리극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국내 대표 공연 연출가 고선웅 연출은 최근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열린 ‘서편제; The Original’(이하 서편제)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청준 소설을 바탕으로 그동안 영화, 뮤지컬, 창극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된 서편제는 이번에 소리의 본질에 집중한 소리극 형식으로 재탄생했다. 무대를 최대한 비우고 그 공간을 오직 소리로 채웠다. 고 연출은 “(작고한) 이청준 선생님이 이 작품을 보고 행복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작품은 소리꾼 부녀가 진정한 소리를 찾아 유랑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배역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아비, 소녀, 사내 등으로 표현했다. “이름도 없이 떠돌았던 수많은 소리꾼의 삶을 전하고자 했다”는 게 연출 의도다.
극 중 아비와 소녀는 걷고 또 걷는다. “소리도 그렇게 굳은살이 박이며 익는 것”이라고 외치는 아비와 그를 따라 걷는 소녀 모두 어느 것 하나 걸치지 않은 맨발이다. 이렇게 고독하고 덧없는 부녀의 고행길은 회전하는 대형 원형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아비가 소녀의 눈을 멀게 하는 대목. 딸에게 한의 정서를 심어주기 위한 아버지의 극단적 선택이다. 요즘 감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비정하고 폭력적이더라도 문학적으로 충분히 허용돼야 한다”는 게 고 연출의 생각이다.
작품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의 핵심 대목과 민요를 포함해 총 22곡을 들려준다.
아비 역에는 남원시립국악단 악장 임현빈과 국악밴드 이날치의 안이호가 발탁됐다. 소녀 역은 국립창극단 단원 김우정과 2022년 전국 창작판소리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박지현(서울대 국악과 재학)이 맡는다.
국립정동극장 개관 30주년을 맞아 처음 선보이는 이번 공연은 다음달 9일까지 이어진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