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억 인구 데이터 무제한 허용…中 얼굴인식 AI, 챗GPT도 제쳤다

입력 2025-10-21 17:48
수정 2025-10-27 16:17
마이크를 든 사회자는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빈자리는 무대에 설치된 화면에 뜬 ‘디지털 사회자’가 대신했다. 국제무대에 처음 데뷔한 디지털 사회자는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었다. 개회사를 일곱 개 언어로 동시통역하는가 하면, 콘퍼런스 내용을 실시간으로 요약하고, 연사의 입에서 나온 핵심 단어에 꼭 들어맞는 사진을 곧바로 화면에 띄웠다.

지난달 17일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난닝에서 열린 중국·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박람회는 인공지능(AI)이 바꿀 미래 콘퍼런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무대였다. 이런 AI 모델을 개발한 업체는 1999년 탄생한 중국 음성인식 기업 아이플라이텍. 중국 정부가 음성인식, 얼굴인식, AI 등을 훈련시키는 데 공공 데이터를 무제한 쓸 수 있도록 허용해준 덕분에 아이플라이텍은 단숨에 세계 최고 수준의 음성인식 및 AI 활용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 규제 완화가 낳은 중국 테크 거인 아이플라이텍의 기술력은 이미 시장에서 검증받았다. 실시간 통·번역이 가능한 언어만 130여 개에 이른다. 단순 통·번역을 넘어 문맥에 맞게 말과 글을 순화하기도 한다. 여기에 AI를 입혔다. 중국 정부가 내준 방대한 공공데이터 덕분에 훈련 강도와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AI로 무장한 아이플라이텍의 음성인식 기술은 중국의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플랫폼 기술로 확장하고 있다. 중국 가전기업 하이얼의 에어컨 생산라인에 ‘품질검사 요원’으로 투입된 게 대표적 예다. 생산라인에서 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꼼꼼히 분석해 불량 가능성과 부품 교체 여부 등을 감지하는 것. 정확도가 99%에 육박하고, 문제가 있는 부품을 걸러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나 줄었다. 아이플라이텍 관계자는 “의사가 청진기로 검진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안후이성 허페이에 있는 아이플라이텍 연구개발(R&D)센터에선 자체 개발한 AI 추론 모델 ‘쉰페이싱훠 X1’을 현실에 적용하는 프로젝트 개발이 한창이었다. 학생이 작성한 시험 답안지를 스캔하면 AI가 채점은 물론 논리력, 창의력 등 분야별 점수와 코멘트를 달았다. 돤다웨이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쉰페이싱훠 X1의 실력은 오픈AI와 딥시크에 뒤지지 않는다”며 “교육, 의료, 사법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이플라이텍의 고속 성장을 이끈 뒷배는 중국 정부다. 공공 데이터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한 덕분에 음성인식은 물론 AI 학습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해외 클라우드에 데이터를 옮기거나 해외 데이터를 국내에 반입할 때 적용했던 까다로운 심사를 없애준 조치는 중국 테크기업에 날개를 달아줬다. “데이터 규제를 풀어줘야 AI 개발에 속도를 낸다”는 기업들의 호소를 정부가 받아들인 덕분에 중국 기업의 AI 데이터 확보 속도는 30% 이상 빨라졌다. 중국 테크기업들이 공산당을 산업 생태계의 감독자가 아니라 ‘촉진자’로 여기는 이유다. ◇ 선 시행·후 규제의 마법세계 최고 얼굴인식 기업으로 성장한 센스타임도 아이플라이텍과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쳤다. 정부의 공공 데이터 개방으로 100억 건이 넘는 이미지와 영상을 학습하고, 연간 400억 회 이상 인식·분석 요청을 처리할 만큼 방대한 데이터 기반을 구축했다. 테크업계에서 데이터 확보 건수는 곧바로 기술 경쟁력이 된다. 제프 시 센스타임 아시아태평양 대표는 “센스타임은 최근 글로벌 멀티모달 모델 순위에서 구글과 오픈AI 등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고 했다.

센스타임은 방대한 데이터를 앞세워 36개 공항과 지하철에서 얼굴인식 입·출입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딥페이크 사기를 막는 신원 확인 솔루션으로 쓰인다. 단순히 사람과 차량,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넘어 도시 관리와 교통 시스템 제어, 빌딩 관리 등에도 활용되고 있다. 센스타임의 ‘비전AI’는 CCTV, 각종 센서, 교통 신호 체계를 연계해 도시 전역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AI와 연계된 CCTV가 교통사고를 포착하면 곧바로 경찰 출동을 요청하기 때문에 사고 대응 시간이 50% 단축됐다. 비전AI는 현재 200개 도시, 3만 개 건물, 2억5000만 대 기기에 도입됐다.

업계에선 중국의 ‘선(先) 시행·후(後) 규제’ 정책을 테크 굴기를 부른 마법으로 풀이한다. 14억 인구가 쏟아내는 각종 개인정보를 기업들이 쓸 수 있도록 허용하되 문제가 생기면 추후 규제하는 방식이다. 자율주행, 헬스케어, e커머스가 이 정책 덕분에 순식간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유비테크의 휴머노이드 ‘워커S1’이 단숨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건 베이징시의 배려로 자동차 품질검사 라인에 투입돼 수많은 데이터와 실전 경험을 빠르게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이 하루라도 빨리 AI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도록 보안성 평가 규제를 대폭 완화해준 덕분에 전자상거래 기업 징둥닷컴은 신속하게 기업용 대규모언어모델(LLM)을 내놓을 수 있었다. 생성형 AI 플랫폼 기업을 운영하는 한 중국 기업인은 “과거에는 ‘이걸 해도 되나’를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걸로 무얼 할까’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허페이=김은정 특파원/라현진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