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강국을 꿈꾸는 사우디아라비아

입력 2025-10-20 15:59
수정 2025-10-20 16:00
가장 보수적인 아랍 국가. 각국 여성 지도자가 방문할 때마다 히잡을 썼는지 아닌지가 논란이 되던 곳. 2018년까지는 여성은 차량을 운전할 수 없었고, 상업 영화관도 없었던 곳. 사우디아라비아다. 올해 초 사우디에 부임할 때만 해도 수도 리야드의 e스포츠 경기장에 수천 명의 젊은 사우디 팬들이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T1의 페이커를 외치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LIV 골프 대회와 호날두가 뛰는 축구 리그를 가진 지금의 사우디는 중동의 엔터테인먼트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사우디의 변화는 우연이 아니다. 2016년 사우디는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석유 의존적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산업을 다변화하겠다는 국가 전략이었다. 정부는 석유와 가스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관광·문화·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단순히 오락거리를 늘리겠다는 게 아니라 경제 체질을 바꾸고 국가 브랜드를 높이려는 구상이었다. 같은 해 설립된 엔터테인먼트청(GEA)은 대형 축제와 공연을 직접 기획하며 정책적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 매년 열리는 ‘리야드 시즌’과 ‘제다 시즌’은 수천만 명을 끌어들이는 문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e스포츠다. 사우디는 올 7월 수도 리야드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e스포츠 월드컵을 개최하며 ‘중동의 게임 허브’라는 위상을 확보했다. 총상금 7000만 달러, 수십 종목의 국제대회, 글로벌 스트리밍 중계가 집약된 이 행사는 사우디의 전략적 산업 육성 의지를 보여줬다. 당시 현장에서 직접 마주한 젊은 팬들의 함성과 열기는 사우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세계와 연결되고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젊은 인구구조가 있다. 사우디 인구의 63%가 30세 이하로,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글로벌 소비 성향이 강하다. 유튜브와 틱톡, X 등을 활발히 활용하며 세계 문화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세대다.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반영해 세제 혜택, 법제 정비, 외국인 투자 유치 등을 통해 문화산업 생태계를 넓히고 있다. 국부펀드(PIF)는 게임·영화·애니메이션 제작 인프라를 직접 지원하며, ‘E스포츠 네이션스컵’, ‘사우디판 넷플릭스’, ‘사우디판 디즈니’를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물론 과제도 존재한다. e스포츠 월드컵의 화려한 개막식에 압도됐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대회를 보러 경기장을 찾는 과정에서는 안내 인력, 사이니지와 같은 개선돼야 할 점도 있다. 콘텐츠 산업 인재와 전문 기술 인프라 부족, 전통적 규범과 개방 정책 사이의 긴장 등도 사우디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경험과 기술, IP를 가진 우리 기업에는 새로운 협력의 기회가 열린다. 사우디가 원하는 빠른 도약을 위해서는 문화상품 기획, 제작, 유통,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외부 파트너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략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경제·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는 동력이 되고 있다. e스포츠 월드컵 마지막 기간에는 e스포츠의 미래를 논의하는 ‘뉴 글로벌 스포츠 컨퍼런스’가 열렸고 사우디 스포츠부, 관광부, 투자부, 정보통신부 장관들도 참석했다. 과거 신기루처럼 여겨지던 사우디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이제 사우디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오아시스가 됐다. 사우디의 대전환은 K-콘텐츠의 우수함을 성공적으로 뽐냈던 우리 기업들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자 동시에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