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출신도 "대본 암기 압박, 1kg씩 빠져"…무슨 연극 이길래 [인터뷰+]

입력 2025-10-20 16:21
수정 2025-10-20 16:46

"첫 공연 전날 이렇게 날을 새운 건 고등학교 2학년 이후 처음이었어요. 깨 있는 시간이 40시간이 넘어서니 '공연을 할 수 있을까' 생각도 들고, '사고인가' 싶기도 했죠."

배우 김신록은 연예계에서도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꼽힌다. 서울대 지리학과 출신인 그는 대학 연극반 활동을 하다 무대에 올랐고, 이후 영화, 드라마를 통해 이름이 알려진 후에도 연극에 출연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어떤 작품에 임하든 "치열하다"는 평가를 받는 김신록이지만, 연극 '프리마 파시'는 주변 사람들도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극도의 긴장감과 부담감을 갖고 임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방대한 양의 대본과 쉼 없는 동선, 여기에 120분 이야기를 오롯이 홀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1인극에 이야기의 메시지까지 가볍지 않기 때문.

김신록은 "그런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첫 공연때 그렇게 괴로워했다"고 웃으며, "첫 공연을 마치고 난 후에야 '꿀잠'에 잤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매 공연을 하 때마다 "1kg씩 빠진다"고 했다.

'프리마 파시'는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던 젊은 변호사가 성폭행을 당한 후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 호주의 인권 변호사가 직접 글을 써 현실적이고 세심하게 성범죄 재판의 실상을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김신록이 연기한 주인공 테사는 똑똑하고 명석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와 비슷해보였다. 여기에 김신록은 특유의 섬세함과 에너지를 더해 성범죄를 당한 후 피해자로 재판에 오르면서 혼란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테사를 설득력있게 그려냈다.

김신록에게 "테사가 한국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성범죄는 무혐의로 검찰 송치되고, 가해자에게 오히려 무고로 고소당했을 거 같다"고 묻자, "그런 생각을 하면 제가 편안하게 퇴근하지 못한다"면서 씁쓸함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구조가 갖는 폭력성을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무고 고소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 다음은 김신록과 일문일답.


▲ 작품 공개 중반부를 넘어섰다.

= 공연을 시작하면서, 하면서 알아가는 것들이 있어서 기쁘고 재밌다. 예를 들면 첫공 이후 이자람 언니에게 전화해서 '(동료 변호사인) 애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어' 이렇게 말했다. 연습할 때 느낀게 있지만. '애덤에게 왜 '도와달라' 전화를 안했을까? 수치심? 맞아' 이랬다. 그런데 공연을 해보니 연습할 때와 다른 의문이 남더라. 애덤은 어쩌면 귀족 출신이라 도와주지 않을거라 짐작을 했을거라고 본거 같다. 제가 도와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그랬다면 도와줬을 텐데, 왜 안했을까. 자존심일수 있고, 편견일 수 있고 다양한 생각들이 공연을 하면서 열리는 거 같다. 결이 달라지더라. 칼로 베듯 결정하기 힘든 순간이 연속이다. 둘이 사귈 때 왜 애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줄리언 여자친구라 생각하는게 싫었나? '그건 모르겠어' 라고 대사로도 있는데, 진짜 모르겠다. 확실하지 않은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더 진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첫공 러닝타임은 30분 가까이 오버됐다.

= 첫공 전날 이렇게 날을 새운 건 고등학교 2학년 이후 처음이었다. 공연 전날 한숨도 못자는 건 처음이었다. 깨 있는 시간이 40시간이 넘어서니 '공연을 할 수 있을까' 싶고, '사고인가' 싶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대학 동기인) 엘리스와는 어떤 사이인가. 애덤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하나가 각성 상태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첫공 시작 전 기도하며 들어갔다. 저의 베스트 컨디션에서 런닝타임은 126분이 나오는 데, 그땐 146분이 나왔다.

▲ 첫공을 마친 후 어땠나?

= 꿀잠을 잤다.(웃음) 두번째도 해결이 안 돼 잠을 못잤다. 이제 10회쯤되니 잠을 자고 있다. 그래도 공연 있는 날에는 아무것도 못한다. 아침부터 대사도 생각하고. 매일 하면 덜 할텐데, (트리플캐스팅이라) 쉬었다가 하니 더 그런 거 같다.

▲ '오열해다'는 후기도 많다. 쉽지 않은 이야기인데 어떻게 그려나가려했을까.

= 2019년 호주에서 쓰인 작품인데 미투 운동 한복판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이야기 뼈대만으로도 힘을 가졌는데, 올해 한국에서 공연될 때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미투 이후에 '말하자, 고백하자. 죗값 치루고 반성하자' 이런 게 있지 않나. 이 이야기가 어떻게 교조적이지 않게 다가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새롭지 않으나 강력하고, 그럼에도 확장된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선택할 때도 그런 여지가 있는지를 봤다. 작년에 대본을 받을 때 공연 확정이 안 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연기적으로 도전할만한 책이었다. 전반부 후반부 세계관도 다르다. 전반부는 의지와 논리, 후반부는 감정들이 치밀어 들어오는 데, 그런걸 하고싶더라.

▲ 대본을 처음 본 후 '이걸 어떻게 다 외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 예전엔 대본으로 쫙 외웠는데, 요즘은 몸과 말이 다 서야 대사가 저에게 오더라. 몸과 동선 같은 것들을 다 찾아낸 순간에 외워진다. 그래서 대사를 공연 전날까지 외웠다. 물리적으로도 많고, 공간의 감각 같은 것들이 매칭되는 곳을 찾아야 해서. 날이서 게 외워지는 건 최종 순간이었다.

▲ 본격적인 연습기간은 얼마 정도였나?

= 딱 2달이었다. 수능 보는 줄 알았다.(웃음) 연습 과정 중에 최종적으로 현재의 (퇴장없는) 모델이 나온 건데, 동선이나 소품의 정리나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그 과정 중에 저런 방식으로 세팅이 된 거다. 테사 1명이 다 해나가는 게 꼭 테사의 생존기 같더라. 각박하고 힘든 일을 홀로 해쳐나가는 거 아닌가. 심지어 테이블을 밀 때 무거워지는 것조차 시지푸스처럼 삶을 굴리는 생존기처럼 느껴지겠다 싶었다.

▲ 3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테사가 모두 다르다는 평이다. 김신록의 테사는 어떤 모습인가.

=저는 기본적으로 다시 서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다시 서는 포인트가 어디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망가졌어, 하지만 여기있어. 그리고 침묵하지 않을거야'라고 하는데 일어나지 못한다. '뭘 붙잡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 건물을 어떻게 벗어나야지 모르겠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것은 바뀌어야 한다는 것, 그 말을 붙들고 겨우 다시 일어나는 거다. 완전히 허물어진 새로운 판이 융기해 솟아 올라오는 것처럼 새로운 땅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회복이 간단하거나 빠르지 않길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현실적이지 않고 교과서적일거 같아서. 또한 사실적인, 힘을 가졌으면 했다. 그런데 이건 마지막에 찾은 거다. 연습을 하다보니 최종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 1인극이라 다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을 거 같다.

=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해 잠을 못잤다. 그런데 1인극이라 꼭 정해진 타이밍에 감정이 오고, 뭘 해내야 한다는 건 없더라. 어제만큼 제가 슬프지 않아도, 그냥 하는 거다. 어떨 땐 판사가 비공개 신문을 종료하고, 배심원이 들어오는데 슬픔이 밀려오고, 어떨 땐 다른 타이밍에 슬픔이 몰려온다. 혼자 무대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정답을 지향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있으면 약속을 지켜줘야 당황하지 않는데, 혼자니까 더 정직하게 할 수 있는 거 같다.

▲ 혼자였기에 알았던 혼자만 아는 실수가 있었나.

= 당연하다. 대사를 빼먹으면 그 다음에 하고, 중요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간다. 집에가서 '내일은 하자' 이러고.(웃음)

▲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도 1인극인데, '프리마 파시'와 어떻게 다른가.

= 이번엔 대본만 90페이지다. 이전엔 50페이지였는데. 대사가 정말 많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서술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엔 서술도 테사의 대사다. 그리고 격렬한 순간들이 많은 작품이다.

▲ 연습할 때 이자람, 차지연 등 다른 캐스팅 배우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 초반에 작품 전체에 대한 해석과 콘셉트를 공유하는데는 시간을 할애했다. 3명이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는데, 각자 성격이 다르다. 공연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연기가 무엇인지, 방식도 다르고, 이력도 다르고. 그래서 어디까지 통일성을 가져야 하는가도 생각했다. 조명이나 음향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만 하고 각자 연기적으로 찾아낸 게 많다. 그리고 보면서 배우고, 좋은 게 있으면 '이 아이디어는 500원주고 산다'고 농담도 하고.(웃음)

▲ 다른 배우의 공연도 봤을까.

= 이자람 배우를 봤다. 차지연은 마지막에 보기로 했고. 차지연 배우가 다쳐서, 나중에 보기로 했다. 이자람 배우는 판소리를 했는데, 그게 1인극이라 구조를 세워 이야기 흐름 안에 데려가는 힘이 대단하다. 저의 거리감, 경쾌함, 속도감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됐다.

▲ 감정적으로 격한 작품이라 어떻게 감정을 정리하고, 다시 새로운 공연을 준비할까.

= 마지막 장이 잘 되면 회복과 함께 마무리 돼 관객보다 빠른 퇴근을 한다. 다들 깜짝 놀라는데, 연습하는 중에 신문 장면부터 잘 해결이 안되는 거다. 뒤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무슨 얘길 하는지 몰랐을 텐 '산산히 무너져내린다' 하고 집에 갔다. 신체적으로도, 심신이 힘들었다. 그런데 17장을 거쳐 마지막 18장이 됐을 때 새로운 대지에 발을 내딪고, 부모들이 아이가 처음 걸을 때 박수를 치는 것처럼 저도 그런 아이가 돼 박수를 받는 거 같았다. 그래서 박수를 받고 뒷문을 열고 나가면 '극복!' 한다. 다시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은 회복이 된다. 물리적으로 신체가 지친 것과 반대로 거대한 회복이 일어난다. 공연을 하고 나면 1kg 씩 빠지는 데, 다시 잘 먹고.

▲ 주변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

= 그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언니들이 왔다. 제가 연기해 온 걸 꾸준히 봐 온사람들인데 '김신록이 해온 연기를 집대성했다'고 하더라. 제 입으로 하기 뭐하지만, '꽃이 피었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웃음) 어릴 때부터 제 작업을 봐왔던 사람들이니까. 서른 두살에 만난 13년 전에 작업한 분들이다.

▲ 테사가 주장하는 성범죄는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설득이 안 될 수도 있었다.

= 미묘한 결이 많다. 쉽게 손가락질 할 수 없도록. '이렇게 성폭행 순간을 미묘하게 써서 득될께 뭐있나. 더 피해자처럼 선명하게 써주지' 싶을 때도 있었다. 가해자가 귀족 출신이면 더 할말 있을텐데, 이 모든 게 복잡하고 미묘하다. 테사가 교활해서가 아니라 신념을 되짚어보면 상충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그냥 보통 사람이구나 싶더라.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게 얼마나 미묘하고 복잡다난한 과정 중에 있나. 그럼에도 왜 안 되나를 첨예하게 들여다보는 거 같다. 정말 예리한 칼을 들고. '현대사회 복잡해. 현대인 복잡해', '구조 안에 우리 모두 피해자야', '이 모든걸 다 들여다보더라도 최종 지점에 안되는 건 안 돼' 이런 얘길 한다 싶었다.

▲ 국내에서는 테사가 재판까지도 못 간다는 반응, 그리고 무고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 그걸 생각하면 마지막에 문 열고 못 나간다. 테사를 무고로 고소할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그래도 무고로 피소되면, 맞서야 하지 않겠나. 이 작품은 세계관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하는 작품 같다. 법대 법으로 하면 끝까지 가는 거다. 요즘 동성 성폭행도 있고, 테사 역시 구조 안에서 위계에 의한 폭력을 행사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 반대 신문하면서 법이라는 미명 하에 2차 가해를 저질러 왔다. 이 세계 안에선 100% 다 피해자고, 다 가해자다. 구조가 갖는 폭력성을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고 고소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 이 재판은 성범죄 고소 후 782일을 돌아온 설정이다. 그 사이 테사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어진 거 같다. 처음엔 자신이 주인공으로서 삶을 헤쳐나간다. 스스로 '신처럼 굴다가 망한다'고 하지만, 신처럼 구는 거다. 전반부는 테사가 호령하고 경험하고 행위하는 세계다. 그런데 파트2로 가면 타인의 증언으로 장소가 그려진다. 내가 내 발로 가는 세계가 아니라 멱살잡혀 끌려가는 세계인 거다. 기억이 침입해 들어오고, 세상이 그렇게 구성돼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다. 감각의 세계라는 걸. 2막 마지막에 지향하는 세계도 논리와 이성과 언어로만 매끈하게 제단해 따지는 세계가 아니라 그 너머로 존재하는 실제의 삶이다.

▲성범죄 피해자가 3분의 1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많은 여성들이 크고 작은 성범죄 피해를 당했다고 말하지 않나. 본인의 경험도 도움이 됐을까.

= 3분의 1이지만 100프로다. 사안의 경중만 있는 거다. 친구들과 앉아 쿨하게 무용담처럼 말한다. 여고 앞 바바리맨이나 지하철에서 엉덩이를 주무른 사람이나. 그리고 더 심각한 거 까지. 스토킹 당하고 데이트 폭력 당한 이야기를 50대에 가까운 분이 말하기도 하더라. 그때 경험이 지금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말하는데, 그게 사실 인간의 인생에서 큰 일 아닌가. 그런데 별일 아닌거처럼 치부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지니까 이런 사회가 된 게 아닌가 싶다. 그 와중에 미투가 '더 말하라' 하게 된 거 같고, 그래서 가해자들에게 '반성하라'고 하고. 그런데 제가 찾아 낸 건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결론내렸다. 어쩌면 막연한 유토피아같은 발상같지만, 디스토피아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도 더 나은 세계를 그리기 위해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 어떻게 우린 나아가야 할까.

= 이런 작품이 많이 올라가길 바라고. 연극을 처음 접하는 분, 가족 단위로, 남자친구와도 보러 온다. 이 작품이 마니아들, 여자들 이런 사람이 아니라 많은 분이 봤으면 좋겠다. 이 연극을 본 사람과 아닌 사람은 다를 거라 생각한다.

▲ 차기작도 정해져 있다.

=10월부터 촬영이 겹쳐있다. '로드'. 2명의 배우가 번갈아가면서 하고 있으니까. 무리되지 않도록 잘 마쳐보겠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