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의사의 손과 눈, 귀를 대신하는 ‘스마트 병원’ 시대가 열렸다. 국내 주요 대형병원은 음성 인식으로 진료기록을 자동 작성하는 ‘보이스 EMR(진료기록)’을 잇따라 도입하고, 영상 판독과 환자 모니터링에서도 AI 활용을 확대하고 있다. AI가 의료진의 업무 효율성을 높인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병원이 직접 AI를 제작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AI 있어 진료에만 집중 가능”
20일 의료계에 따르면 국내 ‘빅5’ 병원 중 세브란스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은 AI가 EMR을 작성하는 보이스 EMR을 병동에서 사용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지난 9월, 서울아산병원은 4월 보이스 EMR을 도입했다. 진료실과 병동 내 설치된 녹음기와 태블릿PC가 환자와 의료진의 대화 내용을 녹음해 실시간으로 EMR을 작성한다. 안중호 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기존에는 머릿속으로 외워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눈앞에 있는 환자에게 집중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AI를 사용하면서 검사와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영상 진단에서도 AI가 활용되고 있다. AI가 의료진보다 엑스레이,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등 분석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끝낼 수 있어서다. 지난해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이 연 ‘뇌졸중 AI 국제 검증 세미나’에선 전 세계 뇌졸중 석학들이 참가해 AI와 판독 대결을 펼쳤다. 그 결과 AI가 판정승을 거뒀다. AI의 뇌졸중 예후(치료 경과) 예측률이 72%로 나타났지만 교수진은 50%였다. 진단 속도에서도 교수진은 평균 45분가량 소요됐지만 AI는 12분에 불과했다. 김동억 동국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AI 기술을 활용하면 증상이 악화될 고위험군 환자의 조기 탐지가 더욱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24시간 환자 모니터링도 거뜬AI는 환자 예후 관찰에도 활용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한국은 2023년 국내 임상 의사 수(한의사 포함)가 인구 1000명당 2.7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하위 두 번째 국가였다. 의료진 부족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의 상태 변화를 제때 인지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 역시 AI가 대안이 되고 있다. 환자의 심박수, 산소포화도, 호흡수 등을 확인해 환자의 이상 징후를 의료진에 알려주는 제품이 나오면서다.
병원 내 AI 도입으로 환자의 목숨을 구한 사례도 있다. 인천나은병원은 올해 5월 씨어스테크놀로지의 환자 모니터링 AI ‘씽크’를 도입한 이후 위급 환자 3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밝혔다. AI가 심전도 데이터에서 심정지의 전조 신호인 심실빈맥을 잡아낸 것이다. 심실빈맥은 부정맥의 일종으로 심장이 과도하게 빨리 뛰는 상태를 의미한다.
병원이 직접 의료 AI를 개발하는 사례도 있다.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은 자체적인 ‘의료용 대규모언어모델(LLM)’ 제작에 나섰다. 의료용 LLM은 의학 교과서와 논문을 기반으로 학습시켜 의료 분야에 특화된 LLM을 의미한다. 의학적 질문에 전문적인 답변을 생성하거나 대량의 의료 데이터를 정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일일이 논문 및 교과서를 찾아봐야 했던 의료진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AI가 의사의 업무효율을 높여주면 그만큼 더 많은 환자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라며 “유병인구가 늘어나는 고령화 시대에 의료 AI 기술은 더욱 각광 받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