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 아트페어 본고장인 영국 런던. 지난 15일 오전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5일간 계속된 프리즈 런던 2025는 영국 미술시장 침체를 체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에너지로 가득했다. 43개국 168개 주요 갤러리가 참여한 이번 페어는 개막 첫날부터 폐막일까지 내내 관람객들로 붐볐다. 영국에 기반한 신진 작가와 전 세계에서 온 신진 갤러리를 전면에 내세운 동선, 남미와 아프리카 예술 등에 집중한 특별 세션, 기후 위기 극복에 동참하는 기부 움직임 등이 새로운 관람객을 아트페어로 끌어들이는 데 주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가고시안, 첫날부터 “솔드아웃”
세계 최대 갤러리 가고시안은 프리즈 런던 개막 첫날 모든 작품이 팔려 나갔다고 발표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출신 예술가 로런 할시의 작품을 단독으로 선보였는데 벽면엔 신작 무제 시리즈가, 중앙엔 광장 표지판으로 만든 1.8m 높이 작품 ‘LODA PLAZA’(2025)가 전시됐다. 할시는 아이들, 자동차, 게임, 이발소, 헬스장 등 흑인 일상을 이집트 유물처럼 거대한 석고 벽화로 표현한다.
가고시안 외에도 여러 글로벌 지점을 둔 메가 갤러리의 판매 실적은 대체로 호조였다. 타데우스 로팍은 올해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은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1987년 작품 ‘Polls’를 85만달러(약 12억1100만원)에, 토니 크래그의 나무 조각 ‘아이비’(2016)를 42만달러(약 5억9800만원)에 팔았다고 밝혔다.
앤터니 곰리의 코르텐 강철 조각 ‘Open Ache Ⅱ’(2023) 등을 포함해 첫날에만 15점 이상 작품이 판매됐다. 타데우스 로팍 대표는 “런던은 작년보다 열기가 한층 일찍 고조됐다”며 “몇 달간 침체기를 지나 시장이 서서히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하우저앤드워스 역시 엘런 갤러거, 에이버리 싱어 등의 작품을 80만~95만달러에 판매한 데 이어 20만~30만달러 사이 작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런던 주요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가 페어와 긴밀히 연결되는 점도 달라진 트렌드다. 서도호 작가의 솔로 부스를 연 리만 머핀은 첫날 작품이 15점 이상 판매되는 성과를 냈다.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가 1주일 연장될 정도로 현지에서 화제를 모은 서도호 개인전 ‘Walk the House’의 영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달라진 동선에 환호한 신진 갤러리“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은 미술시장에도 통했다. 올해 프리즈 런던에선 ‘작지만 강한’ 갤러리가 눈에 띄었다. 프리즈가 다른 아트페어와 달리 ‘모험적 예술을 지향하는 브랜드’라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두 개의 긴 통로 뒤쪽에 대형 갤러리를 배치했다. 전통적인 글로벌 갤러리 부스를 가기 위해선 중소 규모 갤러리를 거쳐 가야만 하는 구조를 의도한 것. 프리즈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소형 부스 가격을 인하하고 대형 부스 가격은 인상하는 등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장치를 마련했다”며 “신진 갤러리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고 균형을 맞추기 위한 장치”라고 밝혔다.
동시대 예술과 적극 소통하겠다는 전략은 올해 선보인 새로운 섹션 ‘현재의 메아리’(Echoes in the Present)에서도 드러났다. 브라질, 아프리카, 이주민 예술가들이 땅과 물질, 기억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을 전시장 중심에 배치해 관람객 발길을 오래 붙잡았다.
◇중동 대전 예고…존재감 커진 한국프리즈는 올해 런던 페어 개막에 앞서 기존 아부다비 아트페어(ADA)를 인수한다고 깜짝 발표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아트바젤이 지난 6월 카타르 도하 버전을 발표한 데 이어 양대 아트페어가 모두 중동행을 택해 행사장 곳곳에선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다. 프리즈는 전시장에 별도의 ‘아부다비 아트 라운지’를 꾸려 만들어 홍보에 나섰고, 이 구역은 행사 기간 내내 입장객들로 붐볐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최고경영자(CEO)는 “17년간 ADA의 성장을 지켜봤고, 걸프 지역은 성장하는 시장이라고 확신한다”며 “2022년 프리즈 서울 출범 후 프리즈 런던, 뉴욕 등에 한국 갤러리가 역으로 참여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처럼 아부다비에서도 비슷한 행보가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트바젤 도하는 내년 2월, 프리즈 아부다비는 내년 11월 열린다.
폭스 CEO 말처럼 올해 프리즈 런던에선 한국 갤러리들이 개막 첫날부터 선방했다. 국제갤러리는 하종현 화백의 ‘접합’ ‘이후 접합’ 등 평면 작업을 3억~4억원대에 판매했고 이기봉 김윤신 이희준 박찬경 등의 작업도 첫날 주인을 찾았다. 프리즈 런던에서 이배와 김택상 작품을, 프리즈 마스터스에서 박서보 화백의 주요 작품을 집중적으로 선보인 조현화랑은 수많은 기관과 컬렉터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부스를 지나던 현지 컬렉터들은 곳곳에서 “(국제갤러리 부스를 가리키며) 이곳은 한국에서 중요한 갤러리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런던=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