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록 가죽이 28m 높이까지 길게 늘어선다. 흰 케이블과 조명으로 연결된 이 구조물에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리듬과 언어가 울려 퍼진다. 이내 익숙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가죽 냄새다. 야생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면 순록의 뼈와 나무로 만든 미로에 다다른다. 이곳은 영국 런던에 있는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의 터바인홀.
2000년 이후 현대미술계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가 되어온 터바인홀에서 지난 14일 조금 특별한 프리뷰 행사가 열렸다. 일반 관람객이 빠져나간 자리에 추운 지방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Goavve-Geabbil(고아베-게아빌)’이라는 다소 낯선 제목의 이 전시는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에 걸친 사프미 지역에 사는 선주민 '사미'출신 작가 마렛 안네 사라가 주인공이다. 그는 사미 생태계와 밀접하거나 순록 목축과 관련한 재료로 조각과 설치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다.
고아베는 사미 언어로 ‘기온 변화로 악화하는 환경’을 뜻한다. 순록을 기리고, 기후 변화로 희생된 생명을 추모하는 뜻이라고. 터바인홀 동쪽 끝 미로의 이름은 '게아빌'인데, 순록 코의 해부학적 구조를 기반으로 만들었다. 이 기관은 1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공기를 80℃까지 가열할 수 있다. 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이곳에 흐르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전시 벽에는 순록 귀표가 새겨진 나무 기둥이 있는데, 사미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전수한 문양이다. 가죽과 뼈가 벽에 스며들어 죽은 순록의 부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미로로 들어간 사람들에겐 예상 밖의 안락함과 명상의 시간이 찾아온다. 테이트모던이 과거 화력 발전소였다는 사실을 환기하면 더 강한 의미로 다가온다.
영국에서 처음 대규모 전시를 하는 그는 “내 삶과 경험을 떠올리며 서로 연결되는 관점을 생각했는데, 전통과 조화로운 공생 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동물의 가죽과 뼈는 사미 공동체엔 단순한 동물을 넘어 생존과 일상의 근간인 존재라는 의미에서다.
이 전시는 현대자동차와 테이트미술관의 파트너십으로 진행됐다. 영국 미술계를 통틀어 가장 긴, 10년의 파트너십으로 명성을 쌓은 현대차가 2036년까지 재계약한 뒤 처음 선보이는 전시다. ‘현대 커미션: 마렛 안네 사라: Goavve-Geabbil’ 전시는 내년 4월 6일까지.
런던=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