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햇볕, 햇살…또 다른 영감의 원천 [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5-10-14 17:17
수정 2025-10-15 09:30


시를 읽다가 무릎을 탁 치거나 박장대소할 때가 있다. 얼마 전 고영민 시인의 시집을 펼쳤을 때도 그랬다. 시집 제목의 <햇빛 두 개 더>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는데 “해피 투게더를/ 햇빛 두 개 더,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햇빛은 몇 개인지 셀 수 없는 불가산명사 아닌가. 그런데 “해피 투게더”의 몬더그린(어떤 외국어 발음이 듣는 이의 모국어 발음으로 들리는 인지적 착각)을 통해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이렇게 환한 빛으로 밝혀주다니! 이럴 때 햇빛은 짧고도 경쾌한 영감을 안겨주는 시의 뮤즈다.

'햇볕'의 이름만 열 개가 넘어

햇빛은 해의 빛(光), 태양의 전자기파 중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 영역의 빛이다. 감각적으로는 시각이어서 색(色)과 통한다. ‘햇빛에 눈이 부시다’ ‘이슬방울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인다’ ‘빛이 파랗다’ ‘우리 겨레는 흰빛을 좋아한다’ 같은 표현이 여기에 속한다.

빛은 생명의 원천이다. 빛은 약 1억5000만㎞ 떨어진 태양으로부터 나온다. 빛의 속도로 8분16초, 비행기로 171년, 걸어서는 4000년 걸리는 거리다. 소리로도 14년5개월에 달한다. 그 먼 거리를 달려온 빛이 광합성과 포도당 분자의 화학적 결합으로 우리를 키운다. 비타민D 합성의 핵심 요소도 햇빛이다. 밤의 달빛도 빛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달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고 태양광을 반사할 뿐이므로 이 또한 햇빛이다.

햇빛과 달리 햇볕은 해의 볕(陽)이다.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적외선 파장, 즉 햇빛에서 오는 밝고 따뜻한 열기를 뜻한다. 시각이 아니라 촉각이다. 그래서 ‘햇볕이 따뜻하다’ ‘햇볕에 옷을 말린다’고 표현한다. 흔히 ‘햇빛이 뜨겁다’고 쓰지만 이럴 땐 열기를 나타내는 ‘볕’을 써서 ‘햇볕이 뜨겁다’고 해야 맞다. 마찬가지로 ‘햇빛에 그을리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다’도 ‘햇볕에 그을리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다’로 쓰는 게 옳다.

햇볕의 이름은 열 개도 넘는다. 계절적으로는 봄볕과 가을볕이 있고, 잠깐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는 ‘여우볕’이 있다. 작은 틈으로 잠시 비치는 햇볕은 ‘볕뉘’, 하루 종일 쬐는 햇볕은 ‘하룻볕’, 저녁 무렵의 햇볕은 ‘저녁볕’과 ‘석양볕’, 대낮에는 ‘낮볕’, 아침에 해가 돋아오르는 것은 ‘돋을볕’이라고 한다. 볕의 세기에 따라서도 ‘불볕’ ‘땡볕’ ‘된볕’ ‘뙤약볕’ 등으로 나눈다.

조온윤 시인의 <햇볕 쬐기>는 시각적인 가시광선보다 촉각적인 열기와 밝음, 따뜻함, 뜨거움 쪽을 보듬는 시집이다. 시인은 “매일 빠짐없이 햇볕”을 쬐며 “두 손을 컵처럼 만들어 햇볕을 담”고 “뙤약볕 같은 외로움을 견디”면서 “밥 먹는 법을 배운 건 오른손이 전부였으나/ 밥을 먹는 동안 조용히/ 무릎을 감싸고 있는 왼손에게도”(‘묵시’ 부분) 똑같은 사랑의 ‘볕’을 전한다. 김남조 시인이 “보고 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라고 읊은 노래의 온기 또한 ‘볕’에서 나온다.

햇살은 무엇인가. 해에서 나오는 살, 즉 얇게 뻗은 줄기를 말한다. 해에서 나오는 빛의 미세한 ‘햇살’은 적당히 부드럽다. 봄날 양지바른 곳의 해바라기에 가깝다. 어감이 산뜻한 우리말이어서 더욱 좋다. 이 햇살의 쓰임은 중첩적일 때가 많다. ‘햇살이 퍼지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 등으로 쓸 때는 시각적인 ‘햇빛’과 가깝고 ‘따사로운 봄 햇살’ ‘햇살이 포근하다’ 등으로 쓸 때는 촉각적인 ‘햇볕’과 비슷하다.

햇빛이 구름에 반쯤 가려져서 마치 갈라지듯 퍼지는 것은 ‘틈새빛살’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천국으로 향하는 사닥다리, 인간과 하늘을 잇는 ‘야곱의 사다리’라고 부른다. 빛과 볕에 관한 표현이 이렇게 풍부한 것은 태양을 대하는 인간의 시선이 그만큼 다각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샘솟고, 우주와 맞닿는 영감의 빛이 반짝인다.

"봄볕은 며느리, 가을볕은 딸에게"

계절에 빗댄 속담 중에 재미있는 게 있다. “봄볕에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 봄볕은 강해서 피부에 안 좋지만, 가을볕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워서 적당히 쬐면 몸에 좋다는 얘기다. 가을 햇볕이 좋은 이유는 뭘까. 우선 자외선이 봄보다 세지 않다. 기상청에 따르면 가을의 평균 일사량이 봄의 70%여서 자외선 지수(5.2)가 봄(6.5)보다 낮다. 여름철 강한 자외선을 막기 위해 멜라닌 색소가 피부에 많이 축적된 상태이므로 가을엔 자외선으로 인한 피부 손상도 적다.

가을볕은 비타민D 합성을 도와 뼈와 치아를 튼튼하게 해준다. 기억력과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해마의 신경세포를 활성화해 뇌 기능과 인지 능력을 향상시킨다. 태양은 면역을 키워 질병과 싸우는 백혈구를 늘리고 우리 몸을 보호한다. 기억력 저하, 무기력증, 혈액순환장애, 어지럼증, 골다공증 등을 예방한다.

심리적 안정감을 높이는 효과도 크다. 우리가 태양 아래에서 활동할 땐 망막으로 들어온 햇빛이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세로토닌 분비를 유도하고, 해가 진 뒤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분비를 돕기 때문이다. 가을볕을 똑똑하게 쬐는 방법은 하루에 20~30분, 주 3회 이상, 피부 손상을 줄이면서 비타민D 합성 효과를 높이는 오전 11시 이전과 오후 4시 이후에 산책하듯 하는 게 좋다고 한다.

해가 뜬다는 것은 동쪽에서 빛이 비쳐온다는 것과 같다. 동(東)이라는 말이 나무(木) 뒤로 해(日)가 떠오르는 모습이다. ‘동트다’(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 오다) ‘해오름’(해가 솟아오름) 같은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빛은 스스로 광채를 내지만, 그만큼의 그림자도 남긴다. 하지만 그림자 또한 밝은 빛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빛에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에 인용된 명언에도 빛과 그림자의 역설이 희망적으로 투영돼 있다. “그림자를 두려워 말라. 그림자란 빛이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비치고 있다는 뜻이다.”